토마스 바흐(64)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차라리 ‘반쪽 올림픽’을 택했다.
IOC가 국가 주도의 도핑 조작 스캔들로 세계를 농락한 러시아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출전 금지라는 최고 수위의 징계를 내렸다. IOC는 6일(한국시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이 같은 결정을 발표했다. 약물 검사를 문제없이 통과한 러시아 선수들이 개인 자격으로 출전할 길은 열어줬지만 이들은 러시아란 국가명과 러시아 국기가 박힌 유니폼 대신 'OAR'와 올림픽 오륜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러시아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시상대에선 러시아 국가 대신 '올림픽 찬가'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쥬코프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그간 자국 선수들에게 러시아 국기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욕적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기에 IOC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가 평창동계올림픽을 완전 보이콧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로써 냉전체제를 막 내리게 한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참가했던 러시아(구 소련)는 30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됐다. IOC가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올림픽 출전 금지 처분을 내린 것은 1964∼1988년 흑백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올림픽 출전 자격을 박탈한 이후 처음이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도 종전 후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다. 도핑 문제로 한 국가 전체가 올림픽 출전 징계를 받은 건 러시아가 처음이다. 개막을 64일 앞둔 평창으로서는 여자 피겨, 아이스하키, 봅슬레이 등에서 강세를 보이는 동계 스포츠 강국 러시아의 불참으로 대형 악재를 만났다.
바흐 IOC 위원장은 집행위원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에 충격을 던진 러시아의 도핑 조작을 두고 "올림픽 정수를 향한 전례 없는 공격"으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러시아 제재를 발표했다. 사무엘 슈미트 전 스위스 대통령이 이끈 IOC 조사위원회는 지난 17개월간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자행된 러시아 선수단의 조직적인 도핑 조작 사건을 조사하고 이날 IOC 집행위원회에 여러 제재를 권고했다. IOC 집행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즉각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의 자격을 정지하고 러시아 선수단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불허했다.
IOC는 또 러시아 체육부 관계자들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승인하지 않기로 하고 비탈리 무트코 러시아 체육 담당 부총리를 올림픽에서 영구 추방하며 쥬코프 ROC 위원장의 IOC 위원 자격도 정지하는 등 고강도 징계안도 내놨다. IOC는 아울러 ROC에 그간 도핑 조작 조사 비용과 앞으로 ITA 설립 운용 자금을 충당하라며 1,500만 달러(약 163억2,000만원)의 벌금도 부과했다.
러시아는 이날 집행위원회에서 여자 피겨 싱글 세계 1위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에게 러시아 측 입장을 밝히도록 하는 등 출전 정지 처분을 막고자 막바지 외교에 나섰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와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등 주요 단체들은 IOC의 결정을 즉각 지지했다. 크레이그 리디 WADA 위원장은 “우리 위원회는 IOC의 결정을 환영한다"며 “이번 조치는 IOC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러시아가 도핑 조작을 했다는 사실을 반영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역시 “IOC가 강력하고도 원칙에 입각한 결정을 내렸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의 도핑 스캔들을 최초 폭로한 캐나다 법학 교수인 리처드 맥라렌도 성명을 내고 "이번 IOC의 결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모든 스포츠 단체는 선수들이 약물이 없는 공정한 경쟁을 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러시아 징계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미국 올림픽 주관 방송사 NBC도 "IOC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IOC의 조치는 적절한 징계인 동시에 도핑과 무관한 선수들이 평창에서 경쟁할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AP통신은 3년 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에게 메달을 뺏긴 선수들도 대대적인 환영을 보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제2의 냉전이 도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을 러시아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약 70개국과 함께 보이콧했고, 소련 역시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에 14개 공산주의 동맹국과 함께 출전을 거부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당국자들과 스포츠계 인사들은 이번 일을 스포츠 규정 위반의 문제가 아닌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 등 러시아가 서방과 빚고 있는 갈등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의회의 스포츠위원회 소속이자 러시아 컬링 협회 회장인 드미트리 스비시체프는 "우리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면서 "이것은 정치적 차이에서 나온 반향"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10월 IOC의 러시아 출전 금지 움직임을 두고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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