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라는 말을 처음엔 겁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내가 용감하다고 여겼을 때 누군가 내게 겁대가리 없는 년이라고 말했으니까.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그날 나는 참으로 용감한 아이였다. 왜 아니겠는가. 가슴팍에는 초등학생의 상징 흰 손수건이, 등 뒤에는 이모에게 선물 받은 부리부리박사 책가방이 매달려 있었으니. 일곱 평생의 히어로 부리부리 박사. 모든 두려움을 없앨 방패. 세상의 모든 지혜와 용기를 끌어 모으는 부적. 그 누구도 나를 막아 설 수 없었다.
입학식은 지루했을 것이다. 꽁꽁 언 초봄의 운동장에서, 교장선생의 긴 축사와 당부 말씀이 이어졌을 것이고, 볼이 튼 아이들은 이것이 학교인가 실망을 했을 것이다. 율동 배우기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그 추운 입학식에 율동배우기 시간이 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두어 차례의 시범이 있은 후, 용기 있는 어린이들은 연단 위로 올라와 춤을 춰보라고 했다. 그 위로 제일 먼저 도착할 어린이 누구겠는가. 물론이다. 거기 가면 어딘가에 있을 엄마 얼굴도 보고, 그 참에 부리부리박사 책가방 자랑도 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왜 놓치겠는가. 어린송아지, 부뚜막에 울고 앉은 어린 송아지, 엉덩이가 뜨거운 어린송아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나는, 그야말로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였다. 엉거주춤 씰룩쌜룩 엉덩이를 흔들어댄 폭소 유발 어린이가 바로 나였다.
입학식을 마치고 간 중국집에서 엄마가 말했다. 겁대가리 없는 년. 남들은 유치원 가서 다 배워가지고 온 걸. 유치원도 못 다닌 년이. 뭘 안다고 올라가. 용감도 하시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이고 겁대가리 없는 년. 어디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던 엄마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나는 혀를 차는 엄마가 속으로는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군만두를 추가로 시켜 내 앞에 놓아주었겠지. 그날 먹은 짜장면과 군만두는 용감한 어린이를 위한 포상 같은 음식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군만두 생각을 하며 계속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용감이란 정말 무엇일까? 투우 소에 멋지게 창을 꽂는 기사는 용감한가 무모한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귀부인들 앞에서 창 시합을 벌이는 기사의 모습은 위풍당당한가 우스꽝스러운가. 돈키호테는 말한다. 용기란 비겁함과 무모함의 극단적인 악덕 사이에 놓여 있는 미덕이라고. 그 사이 어느 즈음을 선택할 수 없다면 무모함의 경지로 올라가는 편이 비겁함의 나락으로 내려가는 편보다 낫다고. 무모한 사람이 용기의 경지에 이를 수는 있지만, 비겁한 사람은 결코 용기의 경지에 가 닿을 수 없다고.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잠자는 사자를 향해 창을 들고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아무래도 용감이 지나쳐 무모함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것도 아프리카의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사자 두 마리라면. 국왕에게 바칠 진짜 중의 진짜. 하루 종일 먹지 못해 굶주려 있는 진짜 사자. 그때, 사자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눈앞을 뿌옇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레케손(Requeson). 레케손은 말하자면 리코타 치즈, 치즈를 만들고 남은 유청을 뭉쳐 만든 유제품에 가깝다. 산초가 그걸 돈키호테의 투구 속에 잠시 감쳐두었다는 건 비밀이다. 그 몰랑몰랑한 치즈가 눈앞을 가로막자, 돈키호테는 그것이 마법사들이 자기의 두개골을 물렁하게 만든 것이라고 여기고, 더 힘을 내 사자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다행히 사자의 눈에 돈키호테는 그저 어린애일 뿐이었다. 사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하품을 했고, 두 뼘이나 되는 혀를 내밀어 눈곱과 얼굴을 닦았다. 어쨌거나 해피엔드다. 그 후로 돈키호테는 사자의 기사라는 별칭이 붙는다.
그런데 아무리 무모한 돈키호테라도, 눈앞을 가로막는 물렁한 치즈가 아니었더라면 끝까지 돌진할 수 있었을까? 그의 눈앞을 가로막던 레케손 치즈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의 다른 이름 아니었을까?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