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가려면 2배 빨리 달려야”
동화 “~엘리스” 인물서 따온 효과
최고 기업도 혁신 멈추면 무너져
한국 산업계도 中 추격에 흔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일본 도시바 사이에 최근 몇 가지 공통점이 생겼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개발한 백열전구로 시작한 GE가 유서 깊은 전구 사업을 정리하기로 방침을 정했고, 세계최초로 노트북PC를 상품화한 도시바도 PC 사업 매각을 추진 중이다. GE는 125년 전 최초로 전구를 상용화했고 도시바는 1989년 ‘다이나북’이란 노트북을 처음 출시했다. ‘세계 최초’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제패했지만 후발주자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져 경쟁력을 상실했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세계 최초란 타이틀은 이전에 없던 제품에 붙기 때문에 혁신성은 기본이고 동종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쉽다. 하지만 세계 최초가 영원한 최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91년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상용화해 ‘워크맨’을 히트시킨 소니는 지난해 배터리 사업을 일본 휴대폰 부품회사 무라타에 팔았다. 1975년 배터리 사업에 뛰어든 이후 축적해온 원천기술과 특허까지 모두 넘겼다. 실적 부진과 이미지센서 등 주력 사업 집중이 매각의 이유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가치가 급등한 메모리반도체 D램은 1970년 미국 인텔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인텔은 D램 독주 시대를 열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자 1985년 D램 시장에서 철수했다. 1983년 처음으로 상용 휴대폰 ‘다이나택’을 출시한 모토로라, 1992년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 ‘사이먼’을 선보인 IBM도 지금은 휴대폰 업계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한 최초로 개발한 도시바도 삼성전자에 1위를 내준지 오래다.
국내에서는 1999년 등장한 세계 최초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싸이월드의 몰락이 꼽힌다. 한때 가입자 3,000만명에 도토리로 연 1,000억원대 매출을 올린 싸이월드는 모바일 시대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 완패했다. 2015년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분사한 뒤 올해 삼성벤처투자의 투자를 발판으로 재기를 모색 중이다.
학계에서는 선발 주자가 주저앉는 이유를 ‘붉은 여왕(레드 퀸) 효과’로 설명한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레드 퀸은 체스판 위에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같은 자리에 있는 앨리스에게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하고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산업계에 대입하면 최초ㆍ최고라도 경쟁자나 후발주자에 맞서 끊임없이 품질을 개선하고 가격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전자산업 등에서 최초 기록을 세우고 1위를 찍은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과 미국의 기업들이 삼성ㆍLG 등 한국 기업의 무서운 추격에 절감해야 했던 레드 퀸 효과를 이제는 중국 기업들이 우리에게 실증해 보인다. 액정표시장치(LCD)는 이미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줬고 반도체와 휴대폰 등도 추격이 거세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세상이 바뀌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해야 1위 자리를 지키고 생존할 수 있는데, 혁신 레이스에서 뒤지면 원조라도 버틸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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