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랍비 트리포(Trypho)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공부 좀 한다는 변증론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가 자기더러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으라 했기 때문이다. ‘예수 운동’이 뜨거웠던 2세기 때의 일이었으며, 그 둘 간의 대화는 유스티누스의 저서 ‘트리포와의 대화’에 전해지고 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실례를 범했기에 트리포는 친절하게 응대하여 주었다. “그대가 신성에 대해 열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을 칭송하오. 하지만 그냥 플라톤의 철학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스도, 그가 만약 진짜로 태어났다면 말이오,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에게 기름 붓기 전까지는 사실 아무 능력도 행할 수 없는 것이라오.” 성경에 능통한 랍비답게 트리포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5) 당시 유대인들은 옛적에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내려올 것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래야만 메시아가 도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엘리야는 다시 내려오신 적이 없었다
엘리야 없이 온 예수, 구세주 맞는가
마침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그의 제자들도 이점이 궁금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도 스승 예수가 정말로 그리스도이시라면, 유대 전통이 말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하늘에서부터 다시 내려 왔었어야 했다. 궁금해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와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소리치던 침례 요한이 바로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한 엘리야였다고 알려주셨다. (마태복음 17:12-13) 예수가 메시아임을 거부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분이 가신 모습 그대로 내려와야만 했다. 즉, 구약성서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상징’에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큰 오해를 받으시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신 것이다. 듣던 군중들은 수군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도 어머니 마리아도 우리가 잘 알기에, 여느 사람처럼 자기 어미 배에서 나온 것을 다 아는데, 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주장하니 황당했던 것이다.(요한복음 6:42) 모친의 몸에서 난 것은 맞지만 눈에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신성을,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묘사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유대 군중들은 고집스런 ‘문자적’ 이해에 갇혀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사람들의 동요에는 아랑곳 없이 예수님은 오히려 한 술 더 뜨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한복음 6:48, 51) 자기 살을 먹으라고 하시니 유대인들 사이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떡을 먹고 목이 메일 것을 염려라도 하신 듯, 같이 마실 음료도 소개하신 예수님의 다음 발언은 군중 한 가운에 폭탄을 던진 격이 되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54-55) 이 그로테스크(grotesque)를 어찌해야 할까? 이를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찬식 때문에 2세기 로마제국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식인종’이라는 루머마저 떠돌았다.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문자적 해석 안에 맴돌던 당시 유대 제자들은 결국 위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떠나버린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0, 66) 한 때 예수의 살과 피가 성찬의 빵과 포도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ㆍTransubstantiation)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신봉되기도 하였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는 고백이나 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신성과 희생, 대속과 관련된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엘리야는 혁명적 변화의 상징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엘리야일까?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할 침례 요한의 상징으로 말이다. 엘리야와 침례 요한은 영광이 아닌 ‘고난’의 측면에서 서로 상응한다. 한때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바랐던 엘리야의 모습은 목이 베어 죽임을 당한 침례 요한의 거친 삶과 사실 잘 어울린다. 당연히 유대사회는 수난과 고통이라는 비극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자의 진정한 모습이리라고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멸시 속에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은 모습을 그린 이사야의 예언이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위대한 사건을 생각해 보자. 이는 예수의 출현으로 일어나게 될 어마어마한 변혁을 상징한다. 엘리야가 살던 기원전 9세기, 당시 바알 숭배를 국교로 삼으며 극악을 떨쳤던 아합 왕가를 무너뜨린 건 바로 예후의 쿠데타였다. 그런데 예후 혁명의 도화선에 실질적으로 불을 붙인 자는 다름 아닌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였다.
예후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마리아의 바알 성소와 그 제사장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보다 앞서 등장하여 그 길을 예비할 자가 엘리야라는 것은, 예후의 혁명과 상응하는 종교적 격변이 예수로 인하여 일어날 것임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엘리야의 도래를 그저 문자적으로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쉽게도 짧은 식견의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기대하는 것은 엘리야가 아니다. 그가 예비한 종교적 핵폭탄이다. 실제로 예수의 출현은 유대사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다시 태어나라”는 말을 이해 못한 니고데모
여러 면에서 상징은 참 멋진 기술이다. 한 단어 뒤에 많은 것을 품어 두고 있으면서 아리송하게 감추어 놓기도 한다. 말하는 자에게는 편리하면서도 멋들어진 기술이며, 듣는 자에게는 진리를 알아채는 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묘미를 모르면 니고데모처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끝으로 그의 이야기를 보자.
니고데모는 유대 지도자이기에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 알려지길 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한밤 중에 예수를 찾아갔다. 반갑게 예수를 한껏 칭송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화답은 꽤 혼돈스럽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거듭 난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 말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니고데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복음 3:4; 새번역) 이 근엄한 유대 선생은 너무나 진지하게 어떻게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가야 할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날 밤 일은 요새말로 ‘웃픈’ 해프닝이었다.
종종 광고에 나오는 ‘비포 앤드 애프터’(before&after) 사진을 볼 때 마다 정말 다시 태어난다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탈모인을 위한 가발 광고에, 성형 전후의 사진을 붙여 놓은 성형외과 입간판에, 헬스장 광고 전단지에 있는 살 빠지기 전후 사진을 볼 때 마다 ‘사람이 정말 거듭 나는구나’ 싶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기독교 주요 신학 개념 중 하나인 ‘거듭남’의 원조 격 이야기다. 니고데모처럼 너무 문자적으로도 말고 그렇다고 신학자들처럼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형외과의 광고 사진을 떠올려 보자.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을 같기 전과 후가 그야말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달라야 한다. 그 광고 속 사진처럼 말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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