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희망이 안 보였다.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희망이 뭔지를 몰랐다. 이제는 알겠다. 희망이 안 보여도 일단 버텨보는 것, 그게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신념이고 인내다.
1999년 첫 딸이 태어났다. 불과 2년 뒤 황망한 사건이 터졌다. 투자사기에 말려들었다. 월급에 차압이 들어왔다. 군복무 중이었던 나는 결국 퇴역을 신청했다. 선후배들 보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면 물러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002년 군복을 벗었다.
제대 후 어머니께 알리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말썽만 부리다가 그나마 군대에서 마음을 잡은 나였다. 갑작스럽게 제대했다고 하면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았다.
일당이 높은 일이라면 뭐든 찾아갔다. 배도 탔고, 인테리어 현장에서도 일했다.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눈앞이 감감했다. 몇 억이란 빚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 집에 쌀이 떨어진 날도 있었다.
결국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가족을 모두 남해에 남겨두고 대구로 올라왔다. 평생 식당 일을 해 오신 어머니를 따라 식당을 시작했다. 구미에 해물탕집을 오픈했다. 조금 되는가 싶더니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면서 손님을 빼앗아갔다. 다시 힘들어졌다. 2009년 무렵이었다.
그 즈음 아내를 대구로 불렀다. 아내는 구미에서 어머니를 도와 해물탕집을 꾸리고 나는 동생과 대구로 올라와 시장 한켠에서 삼겹살집을 열었다. 장사가 잘 안 돼 동생과 나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식당을 운영했다.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아이는 셋으로 늘었다. 아내와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아이들이 있는 처가로 내려갔다. 토요일 일을 마치면 곧장 구미로 내려가 아내를 태워 남해로 향했다. 아침에 도착해 하루를 보낸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드는 걸 보면서 다시 대구로 향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지금은 모두 옛일이 되었다. 동생과 아등바등 꾸렸던 식육점은 어엿한 체인점으로 성장해 지금은 대구에만 10여개의 체인점을 뒀고, 하루 50두를 소화할 수 있는 돼지고기 육가공 공장과 소고기만 전문으로 다루는 정육점을 열었다. 아이들도 모두 대구로 불러왔다. 꿈 같은 시절을 산다는 느낌이 든다. 견디면 정말 해 뜰 날이 온다는 확신도 얻었다.
지난 11월 19일 미루었던 결혼식을 올렸다. 오랫동안 허전했던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듯하다. 결혼식 축가로 ‘붉은 노을’을 부탁했다.
어렵던 시절 ‘붉은 노을’을 들으면 힘이 났다. 원양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갈 때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인테리어 현장을 뛰어다닐 때도, 잠을 아껴가며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식당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붉은 노을’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언젠가 좋은 날들이 올 거란 희미한 확신이 마음에 들어차곤 했다. 내게는 ‘붉은 노을’이 희망의 찬가이자 위로의 노래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애창곡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병철 BBE축산 대표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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