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이 아니라 침략이다.”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한해 2,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 든다. 5만5,000명이 사는 작은 섬에 어지간한 나라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돈을 펑펑 쓰니 지방정부 입장에선 이보다 고마운 일이 없었다. 원주민들이 “베네소더스(외지인은 떠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심지어 손님들을 주저없이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관광객들의 도 넘은 행태가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이다. 속사정을 잘 모르는 우리 눈에는 배부른 투정 정도로 비치지만 이들의 외침은 사실 생존권 투쟁이다. 80여년 전만해도 베네치아에는 16만명이 거주했다. 막대한 수입에 맛을 들인 정부 당국이 구경꾼들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분노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활 공간은 더러워졌고 집세와 임대료도 껑충 뛰면서 정든 터전을 등지는 원주민이 늘었다. 어느덧 도시의 주인은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1만6,000개의 숙박공유 업체가 성업 중인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드리아해의 진주’란 별칭이 붙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저 멀리 캄보디아 앙코르와트까지, 관광객들의 등쌀에 신음하는 명소들은 수없이 많다. 적대감은 이제 관광 자체를 거부하는 반(反)투어리즘(anti-tourism) 운동으로 훨씬 격해졌다.
지구 반대편 섬 제주에서 베네치아의 과거와 오늘을 본다. 2015년 11월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가 제2공항 예정지로 발표된 이후 섬은 바람 잘 날이 없다. 누군가는 머리 띠를 둘렀고 목숨을 건 극한의 단식투쟁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정부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 간 협상이 또 결렬됐다고 하니 당분간 접점 없는 대치 국면이 계속될 터이다.
숫자의 힘은 세다. 정부는 대형 국책사업을 확정하기 전 타당성 조사란 걸 한다. 여러 희생을 무릅쓰고 사업을 강행했을 때 경제ㆍ정책적 이득 여부를 따지는 작업이다. 제주 신공항은 허가 기준인 종합평가(AHP) 값 0.5를 넘긴 0.664로 산출됐다. 소수점 세 자리 숫자는 그렇게 몇천 년을 이어 온 공동체 정체성과 65만 주민의 삶의 질을 간단히 걷어차 버렸다. 평가 잣대의 신빙성, 혹은 전문가들의 면밀한 분석을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다만 해당 숫자가 경제성을 제외한 여타의 가치를 짓밟아도 될 만큼 절대적인가 하는 의문은 든다. 실제 공항 신설 대가로 제주가 자랑하는 자연유산 ‘오름’ 10곳이 깎여 나가고 마을 하나가 통째로 없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순간, 제주를 검색하면 예쁜 카페, 사진이 잘 나오는 이색적 인공공간, 투자 호재와 같은 개발ㆍ소비 일색의 정보만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이미 청정 제주에서는 위험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폭증한 중국인 관광객과 ‘슬로 라이프’를 꿈꾸는 도시인들의 낭만적 일탈이 남긴 흔적 탓에 몸살을 앓는 중이다. 제주의 1인당 쓰레기 발생량은 전국에서 가장 높다. 소각처리장, 매립 시설도 포화 상태이다. 베네치아가 걸어 온 길을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환경 및 문화유산이 파괴돼 원주민이 떠나고 지역 고유성을 지킬 주체들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소비뿐이다. 아동문학가 고 권정생 선생은 2004년 경북 안동에 들어 설 골프장 반대 운동이 좌절되자 “고속도로로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전투기와 같다”고 했다. 경제적 편리에 기대어 생명을 죽이는 자본주의 실체를 향한 물음이다. 제주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지금 전 세계 관광지가 보내는 경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머잖아 거리를 점령한 베네치아 주민들의 성난 얼굴이 우리의 미래가 될지 모른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