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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 비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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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 비판하고 싶었다”

입력
2017.11.30 17:0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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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유리’로 1년여 만에 복귀한 박범신 작가는 “(지난해 일로)누구나 트럼프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에둘러 말했다. 은행나무 제공
신간 ‘유리’로 1년여 만에 복귀한 박범신 작가는 “(지난해 일로)누구나 트럼프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에둘러 말했다. 은행나무 제공

44년간 50여 편의 소설을 쓴 작가 박범신은 이번 주 초 내리 3일 간 같은 양복을 입고 기자들을 만났다. 몇 년 전 지인 자식의 결혼식 주례를 보며 맞춰 입은 양복을 다시 꺼낸 건 신작 출간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다. 28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작가는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듯, 실핏줄이 터져 부은 눈으로 말했다. “인터뷰 앞두고 많이 긴장했나 보다. 작년 일을 겪으면서 내 사회적 자아가 어린애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작가 박범신이 장편소설 ‘유리’(은행나무)를 출간했다. 1915년 태어나 100년간 유랑한 남자 ‘유리(流離)’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은 수로국(한국), 화로국(일본), 대지국(중국), 풍류국(대만) 등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역사 속 난민 서사를 담아낸다. 예정대로라면 지난해 10월에 나왔을 신작은 책 출간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며 무기한 연기됐다. 작가의 부적절한 성적 농담을 고발한 글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고, 동석했던 여성들이 성적 모욕을 느끼지 않았다고 밝혔음에도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는 별로 맷집이 없는 인간 같다”는 작가는 자신의 기사 댓글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시간을 돌이켜 사과문 때문에 오해 받을 줄 알았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까.

“인간적으로는 왜 후회가 없었겠나. 팩트를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다투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기도 했고. (세간의 오해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이 사람 마음이 왜 이렇게 아팠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했던 사과가 팩트를 인정한 거라 느낀 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근원적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온 믿음과 신념이 있다. 내 소설을 읽고 행복했을 독자들이 이런 일로 상처받게 된 것, 그것이 가장 미안하다.”

-논란 이후 작가 개인을 넘어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소설 ‘은교’가 여성혐오 코드로 해석되기도 했다.

“내가 말하기 민망하지만 ‘은교’는 늙음에 대한 고통을 통절히 말한 좋은 소설이라고 믿고 있다. 은교는 단순히 젊은 여성이 아니라, 영원히 경배하고 싶은 불멸의 가치다. 영화 마케팅 과정에서 노인이 17살 소녀를 탐한다고 하는 바람에 소설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재단됐다. 공개 강연 때도 ‘은교들 많이 왔네요’ 농담하곤 했는데, (성추문 논란 후 한쪽에서는) 내가 ‘은교라고 불렀다’고 공격하더라. 가슴이 칼로 찔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지냈나.

“감옥 가라면 갈 수 있지만 펜 놓으라면 살 동력을 잃겠더라.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 철저히 깨닫는 1년이었다. 책 내고 인터뷰 하는 게, 명예를 회복하거나 책 팔아 돈 벌려는 게 아니다. 작가로 살아야 되니까. 글 쓸 동력을 지키고 싶은 간절함 밖에 안 남았다.”

장편 '유리'로 1년여 만에 복귀한 박범신 소설가. 은행나무 제공
장편 '유리'로 1년여 만에 복귀한 박범신 소설가. 은행나무 제공

신작은 죽음을 앞둔 유리가 손녀에게 자신의 지난 삶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란 부제대로 유리는 모든 제도와 억압에서 자유롭기를 꿈꾸지만, ‘짐승의 시대’는 녹록하지 않다. 유리는 식민 수탈에 협조한 큰아버지를 17세 때 암살하며 세상을 떠돌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가담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을 겪고, 전쟁 후 한반도로 건너와 첫사랑 ‘붉은 댕기’의 자식을 거둔다. ‘아무 말’이 떠도는 시대에 귓병이 난 큰 마님을 신통한 방법으로 치료하고, ‘사람이 짐승이 되니 짐승이 사람 노릇하는 시대’에 구렁이 은여우 원숭이와 대화하는 등 판타지 기법을 선보인다.

논란 이후 두문불출한 작가는 온라인에 연재할 때 축약한 ‘박통’시대와 마지막 연인 점순이와의 사랑을 보강해 분량을 10만자 가량 늘렸다. 주인공의 아나키스트적 면모, 고문 받다 옛 기억을 되찾는 장면 등은 작가의 성정과 그간의 심정을 담을 것으로 풀이된다.

-‘촐라체’ ‘고산자’ ‘은교’로 이어진 ‘갈망 3부작’이 끝나고 역사소설을 썼다.

“역사의 날조, 우상화로 기득권이 공고화되는 시대,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정파나 이윤을 떠난 진실한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건 현재진행형이다. 유리가 살았던 100년은 개인의 고유한 삶, 꿈, 정체성이 존중 받지 못하는 짐승의 시대다. 이름을 존중 받을 수 없는 시대이니 이름을 잊어버리고 유신 때 고문 받다 다시 기억하지만 목청껏 말하지 못하다, 죽기 직전에야 손녀에게 이름을 말한다. 소설 쓰면서 내가 유리처럼 살고 싶었다는 걸 알았다.”

-누가 봐도 한반도 얘기인데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 이유는.

“솔직히 작가는 역사소설 쓸 때 문헌에 기록된 사실도 안 믿는다. 오류거나 날조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일본 중국 한국이라고 쓰면 상상력에 제한 받을 대목이 많다고 봤다. 또 침략, 고통의 역사는 동아시아만의 역사가 아니니까.”

-남성을 거부하는 여성공동체, 위안부 부분이 많이 나온다. 문단 내 여성혐오 논란이 한창일 때 개작하면서 영향을 받았나.

“이 소설에 여성주의 관점이 있다면 본래의 내 것이다. 젊을 때 여성 심리를 잘 그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보면서 쓰는 거’라고 했다. 근원적으로 남성 여성을 명백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습관이 없다. 위안부 문제는 분량이 늘어난 건 아니고 ‘짐승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서 썼다.”

-출간 시기로 봐서는 전환점이 돼야 할 책이다

“쓰는 동안 행복했다. 도도하고 거침없는 마음으로 썼고, 40년 넘게 쌓은 소설 기교, 세계관이 성숙하게 여문 느낌이었다. 소설가로 마지막 시기가 열리는 기분이고 그만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유리 아버지 시대, 박정희 유신 이후 시대 3부작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용솟음 쳤다.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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