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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민영환(11월 30일)

입력
2017.11.3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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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민영환이 1905년 오늘 자결했다.
충정공 민영환이 1905년 오늘 자결했다.

대한제국 관료 민영환(閔泳煥)이 ‘을사조약(늑약)’에 항의, 1905년 11월 30일 자결했다. 조약 철회와 찬성파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당시 법원 격인 평리원(平理院)에서 왕명을 거역했다며 견책을 당한 뒤였다. 향년 44세.

민영환은 조선 후기 대표적 권문이자 척신가인 여흥 민씨 일가로, 명성황후의 조카뻘이었다. 문중에서 권력에 가까웠던 삼방파(三房派)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와 고종(26대)의 명성황후, 순종(27대)의 순명효황후를 배출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약 70명이 문과에 급제했고 정승에만 7명이 올랐다. 흥선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府大夫人)도 여흥 민씨 삼방파였다.

임오군란으로 피살당한 악덕 관료 민겸호가 그의 생부였다. 민영환은 민겸호의 맏형으로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흥선대원군의 처남)에게 입양돼 성장했다. 17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20세 동부승지, 22세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20대에 호조ㆍ병조판서를 역임했고, 30대에 한성부윤과 형조판서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지도부가 그를 처단해야 할 탐관오리라 지목한 것은, 그가 실제로 오리(汚吏)였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 척신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개화파이자 개혁파였고, 러시아의 힘으로 청ㆍ일을 견제하려 했던 온건 친러파였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전권공사 등으로 미국 러시아 등 외국을 자주 다니며 서양 문화와 정치를 익혔다. 군부ㆍ내무대신 등을 겸하며 독립협회를 후원했다.

러일전쟁(1904) 직후 친일파가 득세하며 그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났다. 순국 당시 그는 황제의 군사시종기관이었던 시종무관부 관장(육군부장)이었다. 그는 황제와 외국사절, 백성에게 각 1통의 유서를 남겼다. 순국 후 충정공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사후 종묘에 함께 배향됐다.

그는 1894년 제정러시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축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돼 윤치호 등과 함께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없던 때여서 그랬는지, 일본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와 미국으로, 다시 배를 타고 영국과 독일 등 유럽을 거쳐 러시아로 갔고, 귀국길에는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순회했다고 한다. 그 6개월 여의 세계일주 기록을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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