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촌 아닌 곳에 산다는 이유로
동료들 내게 안타까운 시선 보내
돈 없이도 행복하단 믿음에 의문
‘자격지심으로 이러나’ 생각도
아이가 자랄수록 고민은 더 커져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학교가 정말 인생의 행복을 좌우할까요. 몇 년 전까지도 저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에선 노골적으로 서로의 차를 비교하고 사는 아파트를 묻고 그걸로 사람의 서열을 정합니다. 국산차를 타고 집 가까운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저는 낙오자가 된 기분이에요. 더 괴로운 건 회사 사람들을 한심하게 보면서도 정작 제가 사는 아파트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은 저를 볼 때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저는 졸업 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집안 사정으로 인해 10년만에 다시 고향에 내려와 꿈과 상관없는 일반 기업에 입사했습니다. 다른 회사도 경험했지만 이곳처럼 집, 학군, 돈을 따지는 곳은 처음이에요. 대화는 늘 누구 시아버지는 어디 골프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더라, 누구 아이는 해외 어디를 다녀왔더라, 우리 나이 대에는 벤츠 무슨 시리즈 정도는 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아파트 못 살아서 아이한테 미안하다” “아이 반 친구는 파리에 갔는데 우리 애는 도쿄 보내서 창피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진저리가 납니다.
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회사 사람은 소위 부촌에 삽니다. 서울로 치면 강남이죠. ‘강북’에 사는 저를 그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요. 이게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아주 유치한 에피소드인데, 명절에 회사에서 부서원들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주소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담당자가 한 명씩 주소지를 묻고 다들 앉은 자리에서 대답하던 와중에 제게는 슬쩍 쪽지로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더군요. ‘강북 주공아파트’에 사는 저를 배려한다는 의미였겠죠. 저는 반발심에 앉은 자리에서 제 주소를 불렀고, 담당자가 되려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뉴스에 제가 사는 동네 초등학교에 다문화 가정 아이가 많다는 애기가 나왔는데 부서원들 모두가 저를 걱정하더군요. 그런 학교에 어떻게 아이를 보내냐며 ‘강남’으로 이사오란 조언에 저는 할 말이 없었어요. 제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인 걸요.
이런 분위기가 싫어 가급적 말을 섞지 않고 있는데 부서원 단체 카톡방에서 “(제가) 자격지심에 저러니 우리가 이해하자”는 말이 나돈다는 걸 들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도 ‘정말 내가 자격지심으로 이러나’란 의문이 들어요.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다들 벤츠 얘기를 할 때 혼자 속으로 남편의 낡은 아반떼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게 돼요. 그러면서도 ‘책도 안 읽고 서울 생활도 안 해본 우물 안 개구리들’이라며 회사 사람들을 경멸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해요. 지역의 ‘강남권’에서 성장한 저와 달리 남편은 어려운 집안에서 오직 공부만으로 대기업에 간 소위 ‘개천용’입니다. 제게 “너는 보드랍게 자라서, 어려운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모른다”고 해요. 아이가 자랄수록 고민은 더 커져요. 저는 그냥 아파트 옆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기로 했는데, 영어 유치원에 사립초등학교를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듭니다. 내 소신 때문에 아이에게 기회를 박탈하는 것 아닐까 하고요.
입사 초까지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차별 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산다면 돈이 없어도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흔들리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에요.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고 큰소리 치면서도, 50대에 저들은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고 나는 그때도 좁아터진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회사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도 그냥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아닌지… 고고한 척하는 저에게 누군가 ‘너도 우리처럼 되지 않으면 후회할 걸’이라고 비웃는 것만 같습니다.
(이연희, 가명ㆍ 40ㆍ회사원)
마음은 경제적 풍족함 원하지만
그런 욕구를 저급하게 여기면서
무의식 속에 억압해 왔을 수도…
평등ㆍ배려 등 가치 지향하더라도
내면의 욕망 살피는 일 먼저해야
지금 연희씨를 가장 힘들 게 하는 건 뭘까요. 연희씨 본인도 여기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답변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해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첫째 집단의 압력이 있을 수 있어요.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룸살롱에 가는 걸 당연히 여긴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부적합한 인간이라는 생각과 함께 불편해질 거예요. 두 번째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 느끼는 열등감입니다. 세 번째는 이른바 ‘주시 불안’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어요. 네 번째는 내면에 잠재돼 있던 갈등이 지금 다니는 회사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불거져 나온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연희씨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결되지 않은, 그러나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갈등요소가 건드려지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운 것일 수 있어요.
제가 네 번째에 가능성을 두는 이유는 연희씨 사연에서 유독 개인적인 내용들이 많이 빠져 있기 때문이에요.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지, 뭐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괴로웠는지, 혹은 다른 게 없더라도 ‘이것만 있으면 괜찮아’라고 여기는 건 뭔지. 전 이게 공란으로 비워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단서라고 봐요. 연희씨는 ‘차별 없이 서로를 배려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했죠.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만약 누군가 저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전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이 편안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을 것 같아요. 이건 의사로서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제가 피부로 느낀 것이에요.
정의와 평등, 배려는 가장 상위에 속하는 가치지만,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서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다시 세워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가난했던 경험으로 다른 건 몰라도 궁핍은 못 참는다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대한 욕심만은 못 버린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에 비하면 연희씨의 기준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려요. 왜 그럴까요. 어린 시절 어떤 경험을 했고, 그래서 뭘 원하게 됐고, 뭐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고통스러웠고, 왜 이런 얘기가 없을까요. 물론 돈이 우선시되는 회사에 다니면 누구나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연희씨는 소위 말하는 강남권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가난한 건 아니에요. 빚에 시달리지도 않고 남편도 좋은 기업에 다니고 있죠. 그런데 왜 돈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걸리는 걸까요. 연희씨 스스로 이 질문을 해야 해요.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연희씨가 어쩌면 윤택한 삶을 원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학교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 그런 욕망을 저급한 것으로 여겨 무의식 속에서 억압해왔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서,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종국엔 그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어요.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연희씨가 서술한 회사의 분위기는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에요. 당신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게 절대로 아니에요. 분명히 그런 대화가 오갔고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러나 연희씨가 느끼는 고통은 마치 로또 당첨자들이 탄 배에 끼어 탄 사람과 맞먹는 수준이에요. 과장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크다는 거에요. 원하는 게 꺾이거나 영영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의 좌절은, 남을 향할 땐 손가락질로, 나를 향할 땐 위축으로 표출됩니다. 연희씨는 이 둘 다를 겪고 있어요. 고통이 클 수 밖에 없죠.
혹시 본인의 마음 깊이 경제적 풍족함과 그걸 누리고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게 범법적 행위거나 남을 해치는 게 아닌 한,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평등과 배려는 물론 너무나 소중한 가치예요. 그걸 성인이 되고 자녀를 낳은 후에도 잊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갖는 좋은 차와 넓은 집에 대한 욕망도 그렇게 지탄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에요. 연희씨 마음 속엔 이 두 가치가 완전히 상반된 것,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해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욕망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두 가치의 통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연희씨,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도 비싼 가방을 갖고 싶어할 수 있어요. 그걸 손가락질 할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 것보다 더 우선돼야 할 건 현실을 기반으로 자기 내면의 욕망을 통합하는 일입니다. 이걸 안 하면 인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형이상학적 가치를 좇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고, 호화로운 것을 욕망하는 것도 인간이라서 하는 일이에요. 둘 다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에요.
본인의 가치가 스스로에게 고통이 된다면 잠시 내려 놓으세요.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시작하세요. 내 인생에서 좌절된 건 뭐고, 만족된 건 뭔지, 그래서 결론적으로 뭐가 우선이고, 뭐가 나중인지. 글로 써보고 소리 내서 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세요.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언제든 불거질 수 있습니다. 연희씨의 문제는 회사를 나온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가치를 명료하게 하지 않으면 삶의 여러 단계에서 언제든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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