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의 꽃’ 불리며 치열한 경쟁
인사권자 눈치 안 볼 수 없는 구조
대형사건, 민감 사안 판결에 영향
‘재판장 독재’ 합의부 체질 개선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보호 기대
법관 승진제도는 일본밖에 없어
“승진 기수가 다가 오면 엄청 목숨 걸어요. 사건 처리 건수가 근무 평정에 중요하게 반영되는 구조라 사건 빼는데(처리하는데) 바빠서 고1, 고2, 고3, 재수생이라 부를 정도죠.”
“고법부장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재판을 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통계 신경 쓰고 법원장님 평정 신경 쓰고 일종의 강박에 빠지죠.”
‘법관의 꽃’이라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시기를 앞둔 중견 법관들 사이에 벌어지던 살풍경을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26일 이렇게 설명했다. 정원이 150명 정도로 한정된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는 판사의 유일한 승진코스다. 차량이 제공되는 차관급 대우가 시작되고 대법관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로도 여겨지는 만큼 승진시기를 앞두고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승진에서 밀리면 스스로를 ‘패잔병’으로 여기는 문화도 만연하다. 예전엔 떨어진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이 대거 옷을 벗고 로펌에 합류해 ‘전관’이 되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22일 사법부 개혁카드로 고법부장 승진제도 폐지를 가장 먼저 꺼내 들자 법원 안팎에서 후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헌정 사상 최초로 고법 승진제도를 실질적으로 폐지하는 만큼 사법부에 미칠 긍정적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재판을 받는 국민 입장에게도 그 효과를 느끼게 될 것이란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고법 부장 승진제도가 폐지되면 인사권자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어 ‘소신 판결’이 안착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법관은 개개인이 헌법상 독립된 기관으로 대우받지만, 실제로는 승진을 위한 ‘엘리트 코스’가 존재하는 만큼 사실상 평정을 하는 상급자와 대법원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합의부 배석판사→단독판사→법원행정처 심의관→지방법원 부장판사→고법 부장판사→법원장으로 이어지는 공고한 승진구조가 자리잡은 탓이다. 배석판사는 재판장이, 단독판사는 소속 법원장이 직접 평정을 매기고, 인사를 할 때 대법원장이 근무평정을 토대로 최종 판단을 내린다. 그럼에도 대법원장이 판단하는 기준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특히 핵심 보직인 법원행정처 심의관 발탁이 그렇다. 고법 부장 이상 고위법관(179명) 가운데 대법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와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이 80%(140명)에 달한다는 사실만 봐도 윗선의 눈밖에 나지 않아야 승진한다는 일선 판사들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2009년 신영철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소속 형사단독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당시 촛불집회로 재판에 넘겨진 시위자의 사법처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이 같은 승진구조를 활용하려 했던 대표 사례로 회자된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형사건이 많고 민감한 사안이 많은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판결을 할 때 판사 개개인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봐야 한다”며 “인사권의 핵심고리가 끊어지면 소신 재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법 부장 승진제도 폐지되면 합의부 재판이 강화돼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가 한층 더 보호 받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고참 재판장 1명과 후배 배석판사 2명이 진행하는 합의부 재판은 사실상 ‘재판장 독주 체제’라는 게 판사들의 공통 의견이다. 한 고법 판사는 “합의부에서 3명이 합의를 하라고 하는데 자신을 인사 평가하는 사람과 치열한 논박이 가능하겠냐”며 “재판장이 자신의 인사를 좌지우지 한다는 인식이 사라져야 사건에 대한 합의 과정도 허심탄회하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처리 수를 늘리기 위해 화해나 조정을 강요하다시피 했던 문화도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법관 승진제도는 외국에서도 생소한 개념이다. 미국이나 영국에는 법관 승진이나 직급개념이 아예 없고, 독일은 상급법원에 자리가 나오면 일부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승진이나 발탁 개념은 아니다. 일본만 우리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1년 고법부장 제도 폐지를 한 차례 시도했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정기 승진인사를 단행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은 단순한 통계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며 “승진으로 평가하는 대신 업무에 대한 법관 윤리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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