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소녀 아닌) 여자랍니다.”
벌써 스물 일곱 살이라며 대뜸 나이부터 말했다. 10년 동안 소녀시대로 살아온 서현은 어리기만 한 막내 이미지를 벗고 싶었는지 모른다. “항상 어린 이미지인 것 같아요. 인간적인,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데 그렇게 못했어요. 이젠 술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는데 그런 걸 잘 모르시더라고요.”
최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서현은 여전히 어리게만 보는 시선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소녀시대로 활동하며 쌓은 발랄하고 풋풋한 이미지를 이제 내려놓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한 듯 보였다. 명목은 최근 종방한 MBC 드라마 ‘도둑놈 도둑님’과 관련한 인터뷰였지만, 그간 하지 못했던 속 얘기를 꺼내놓고 싶은 듯 했다. 그는 소녀시대 멤버가 아닌 배우 서현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기를 바랐다.
서현은 최근 연습생 생활까지 포함해 15년 간 몸 담았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SM)를 나왔다.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한 가족 같은 곳이었으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동료 멤버 수영, 티파니와 함께 SM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소속사를 통해서만 입장 정리를 했을 뿐 그 어느 멤버에게도 결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현은 심사숙고 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직접 언론에 전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이제 언니들의 뒤에서 보호 받던 막내가 아닌, 가장 먼저 당당하게 스스로의 일을 결정할 줄 아는 서현이 되기로 한 것이다.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서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10년 전 싱글 앨범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한 소녀시대를 처음 만났을 때 서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각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 대기실에서 만나거나 인터뷰를 할 때도 서현에게 돌아가는 질문이나 답변은 한정돼 있었다. 막내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양보와 배려를 먼저 배우게 했다. 소녀시대에서 그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팀워크라는 이름으로 막내의 자리를 채워갔을 뿐이었다.
서현이 SM과 결별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던 이유도, 수동적일 것 같았던 소녀시대의 막내 이미지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런 점이 서현이 SM을 박차고 나온 이유가 아니었을까. 서현은 “분명히 힘든 것을 알지만 각오를 하고 있다”며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면서 내 스스로가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팀에서 막내로 있으니까 항상 보호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언니들은 오히려 그걸 부러워하기도 했지만요.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그런 타이틀 안에만 갇혀 있고 싶진 않았어요. 소녀시대의 막내는 영원하니까 변함없지만 그 안에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언니들에게 피해가지 않게 제 인생은 저 스스로 주도적으로 이끌고 싶어요.”
서현은 “모험을 즐긴다”고 했다.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직접 해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지난 10년 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매일 바빴다. SM이라는 울타리 안에 만족하며 달려왔다. “워커홀릭”이었다. 쉬는 날에도 일 생각만 했다. 마음의 여유 없이 스케줄 준비가 항상 강박관념처럼 자리했다. 서현은 “10년 동안 2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쉴 때도 항상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뭐하고 있지?’ ‘내 꿈이 뭐였더라?’ 등 마음의 방황을 했다. 어느새 일기장에는 스케줄 일정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하루하루 뭘 했는지 기억이 도통 안 날 때가 더 많았다.
“최근에 드라마를 끝내고 완전하게 쉰 게 처음이에요. 그 전에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릴 정도로 여유가 없었죠. 한 템포 쉬니까 좋더라고요. 너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한 거죠. 왜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못했을까 싶어요. 이제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좀 챙기면서 살고 싶어요.”
서현은 소녀시대로 활동하며 스캔들 한 번 없이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다. 누가 시켜서기보다는 철이 일찍 들어서다. 그는 “내 안에 규칙들을 정하자”며 10년 뒤를 내다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30분이라도 책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거나, 콧소리가 들어간 말투를 고치려고 톤을 낮춰서 말하려고 하는 등 스스로를 제어하는 능력을 키웠다.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10년 간 정상을 지켜온 이유였다.
“많은 분들이 홀로서기가 힘들 거라 걱정하세요. 힘들면 힘든 대로 일단 해쳐나가고 싶어요. 그러다 부족함이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다른 곳도 찾아보고요. 열려 있는 자세로 활동하려고요. 어떤 게 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깡소주 아가씨’ 별명에 행복”
서현은 어딜 가나 소녀시대 막내로 불렸다. 그런데 요새 그 수식어가 바뀌었다. 한 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데 한 아주머니가 “아이고, ‘깡소주 아가씨’ 아니에요?”라며 반가워했다. 서울 상암동 MBC 근처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한 아저씨도 “깡소주 파이팅!”하고 응원을 전했다. 서현은 눈물이 날 뻔할 정도로 “놀랍고 신기”했다. 예상 못했던 반응에 더 힘이 났다.
그는 ‘도둑놈 도둑님’에서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수사관 강소주를 연기했다. 중ㆍ장년 시청층이 많은 주말드라마 특성상 아주머니와 아저씨 팬이 늘었다. 50부작인 긴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건 처음이라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깡소주’라는 말만 들어도 웃음꽃이 핀단다.
“첫 주연이라 책임감이 엄청나서 목숨 걸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50부의 반 정도 지나가면 더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했지만 오산이었어요. 매번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면서 감성이나 표정, 대사가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정말 많은 걸 배운 드라마였어요.”
서현은 ‘도둑놈 도둑님’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다. 아이돌 출신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상대역이었던 배우 김지훈은 “서현은 대본은 안 가지고 다닐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서현은 “대사 외우기는 기본적인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며 “만약 NG라도 나면 대본에 의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대본을 아예 소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손에 잘 들고 있지 않으려 했다”고. 그래야 “NG가 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어서”였다.
서현은 배우로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진정성 있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SBS 드라마 ‘열애’(2013)와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2016)에 출연하며 워밍업도 했다. 처음에 어색하고 어려운 듯 보였던 연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현과 동시에 본명인 서주현으로도 활동할 계획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서주현 이름을 올렸다.
“대본을 분석해서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연기에 대한 매력을 알게 됐고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등 사랑이야기를 많이 그려보고 싶어요.”
가수 활동을 접는 건 아니다. 소녀시대 멤버로 활동하는 등 가수로서의 삶도 이어갈 계획이다.
“소녀시대로 앨범을 낸다면 참여하고 싶어요. SM을 나왔지만 소녀시대가 해체된 건 아니니까요. 솔로 가수로 활동도 할 예정입니다. 제 목소리를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음악은 제 분신이거든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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