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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법조인이 드문 시대… 김병로 선생이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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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법조인이 드문 시대… 김병로 선생이 등불”

입력
2017.11.23 20:0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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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생애

10년 동안 취재해 책으로 출판

“가인 삶이 우리 삶 변화시킬 것”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2일 연구실에서 저서 ‘가인 김병로’를 펼쳐 보이며 김병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2일 연구실에서 저서 ‘가인 김병로’를 펼쳐 보이며 김병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접대받는 게 무슨 관행인가. 판사는 관행을 따라 살지 말고 판사로서의 절대 윤리를 유지해야 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 선생이 반세기도 전에 던진 저 메시지는 존경받는 법조인을 찾기 힘든 이 시대에 여전히 살아 있다. 지방 변호사가 출장 온 판·검사를 초대해 회식하는 건 ‘관례’라는 후배 판사 말에 김병로 선생은 “사건 담당 변호사로부터 한 끼의 주식을 대접받는 것이 무슨 관행이냐”고 호통을 치고는 그 판사를 지원으로 인사 조치했다. 1950년대 중반 일이다. 불신으로 얼룩진 작금의 법조계에 긴 울림을 준다. 오늘날 법관윤리강령이 ‘사건관계자나 변호인으로부터 식사나 향응 받는 것을 금지’하는 건 거듭된 법조비리와 사법파동을 대가로 치르고 정립된 것이다.

한인섭(58)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김병로 선생의 행적과 생애를 밟는 데 10년을 보냈다. 22일 서울 관악구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낮엔 별이 안 보이지만 암흑기엔 작은 촛불 하나도 주변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과거 법조계의 불빛을 찾다가 항일 변호사로, 미군정 사법부장과 초대 대법원장으로 활동하며 주요 인물을 모두 변론하고 한국 기초법학의 기틀을 닦은 김병로 선생에 천착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초 ‘나쁜 법률가들’의 사례를 모아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사법부 흑서’를 집필하려다가 “교훈적인 사례를 들려주는 게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본격 집필에 앞서 취재에만 10년이 걸렸다. ‘가인의 시대와 생애 공간에 들어가 살기’ 위해 학적증과 졸업증명서는 물론 그의 첫 논설 ‘이상적 형법의 개론’ 등 1차 사료를 풍부하게 모으는 데 시간을 쏟았다. 사료를 음미하며 가인과 대화했다. 그렇게 당대의 상황을 신문기사 등을 통해 연구하며 기자 입장에서 기록한 책은 당초 계획인 300쪽을 훌쩍 넘어 920쪽에 달했다. ‘지공무사(至公無私·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이 지극히 공평함)’한 가인의 삶의 여러 면모를 가능한 한 많이 보여 주기 위해 한 교수는 가인의 변론기록을 소리 내어 읽는가 하면 현장에 직접 가 보기도 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2일 연구실에서 저서 '가인 김병로'를 펼쳐 보이며 김병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2일 연구실에서 저서 '가인 김병로'를 펼쳐 보이며 김병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청년기에는 의병항쟁에 뛰어들고 일제치하에선 항일지사는 물론 소작인과 화전민까지 대변한 김병로 선생은 줄곧 “판사는 가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법관의 청렴이 강직과 통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김병로 선생은 “판결문은 추운 방에서 손을 혹혹 불어가며 써야 진짜 판결이 나온다”며 법관이 부유하고 기름이 가득 묻은 손으로 판결문을 쓰면 어려운 사람 편이 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런 강직함으로 좌우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 법률가로 활약했고 법을 유린하는 정권에는 헌법으로 맞섰다.

김병로 선생에 관한 저술은 전직 기자인 김진배 전 국회의원이 정리한 ‘가인 김병로’(1983)와 정치학자 김학준의 ‘가인 김병로 평전’(1987) 등이 있지만, 언론과 정치적 관점에서 쓴 것이어서 법조인 김병로를 해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한 교수는 법률가 관점에서 가인의 법률가로서의 생애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책은 개화기 의병항쟁기부터 일제강점기, 광복 후 정부수립과 이승만 정권, 군부독재 시절 등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살아온 ‘법률가 김병로’의 생애를 24장에 걸쳐 다뤘다.

지난 8월부터 법무검찰개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도 10년의 노고 끝에 결실을 본 한 교수는 “말은 울림이 없다지만 삶을 통해 울림을 준다. 가인의 삶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질료가 될 수 있다”며 “이 책이 가인과 대화하는 통로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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