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윤동주 지음ㆍ이성표 그림
보림 발행ㆍ40쪽ㆍ1만2,000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소년, 온몸이 파란 소년이다. 허공에서인 듯 저 세상에서인 듯, 오롯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본다. 머리에 내려와 앉은 다홍빛 낙엽은 이승의 것인 듯 생생하다. 한지 느낌의 까슬한 종이는 여백이 많아서 한층 쉬이 손때가 타겠지만, 코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 그림책이 소장용 예술품이라는 뜻이다. 세로쓰기의 손 글씨체 제목 ‘소년’에 이어진 담백한 고딕체 저자 정보도 조촐하기 그지없다. 표지 그대로 한 폭 그림이다. 책상이나 창턱, 방안 어디에라도 기대어 놓으면 금세 둘레가 고즈넉해질 듯하다.
표지를 열면 파랑 색면이 두 번 세 번 겹쳐진 면지가 출렁, 시야를 덮친다. 그 다음, 최소한의 정보가 점 찍힌 채 하얗게 비운 속표지는 ‘잠수!’라고 나직이 외치듯, 이 책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신호한다. 시작, 표지의 그 소년이 걷기 시작한다. 이제 독자는 주인공의 보폭대로 따라 걷는다. 다홍빛 낙엽이 소년의 어깨로 배로 떨어졌다가 다시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대기 속을 천천히 뒤쫓는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화면 위에서 읊조리는 시구를 배경음으로 듣는다. 소년이 데려간 곳은 연두빛 봄 이파리 분분히 흩날리는 벤치, 작은이(소인)가 되어 거기 누운 채 소년이 바라보는 하늘은 시구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를 성큼 뛰어넘는다.
소년은 멍드는 법이다. 소년의 행보는 내면과 외부로 이어지며, 마침내 파랗게 멍든 바다 같은 슬픔에 잠긴다. 파랑의 장막을 찢고 나와 강물에 비친 자신을 수굿이 들여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낯익다. 시인의 ‘자화상’ 한 구절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와 겹친다. 애써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 시구와 그림, 장면 장면의 고유성이 강렬하고도 평화로운 시화첩이다. 자신이 매혹된 색깔 ‘파랑’을 마음껏 쓰고 절제하면서 윤동주와 시 ‘소년’을 구현한 이성표의 공로는 막대하다.
윤동주는 이 땅에서 자라는 소년들이 처음으로 내면화하게 되는 시인이지 싶다. 이 나이에도 그 고귀한 이마와 서늘한 눈매의 초상, 생애와 죽음, 시편들 단어마다에 찍혀 있는 자의식의 통증을 맞닥뜨릴 때면 자신과의 싸움에 맹렬하던 질풍노도를 떠올리게 된다. 초중고 재학 중 내내 신종 플루와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와 세월호 참사를 겪고 마침내 ‘수능 연기’까지 치른 주위의 ‘파란만장’ 99년생 소년들에게 선물하기에 좋겠다. 다양한 형식으로 여러 차례 열렸다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을 놓친 서운함도 이 그림책으로 달랠 수 있겠다.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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