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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오디세이] 내려놓음의 미학, 송승헌을 180도 바꿔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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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오디세이] 내려놓음의 미학, 송승헌을 180도 바꿔놨다

입력
2017.11.23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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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 역만 맡으며

여 주인공 병풍에 불과했지만

어눌한 말투에 슬랩스틱으로

드라마 ‘블랙’서 반전 매력 펼쳐

병맛코드를 너무 잘 살려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 평가

벌써부터 CF 시장도 들썩여

배우 송승헌이 케이블채널 OCN 드라마 ‘블랙’에서 강렬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익살스런 코믹 연기로 호평 받고 있다. CJ E&M 제공
배우 송승헌이 케이블채널 OCN 드라마 ‘블랙’에서 강렬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익살스런 코믹 연기로 호평 받고 있다. CJ E&M 제공

“쪽쪽쪽! 흐으음~”

최근 케이블채널 OCN 드라마 ‘블랙’ 촬영 현장에 낯뜨거운 광경이 연출됐다. 배우 송승헌(41)이 동료 배우 고아라와 함께 ‘키스신 리딩(대본 읽기)’을 펼친 것이다. 장르물 위주로 연출해 키스 장면을 한 번도 찍어본 적 없는 ‘블랙’의 김홍선 PD를 대신해 송승헌이 연기 지도에 나서면서 빚어진 장면이다. 송승헌의 능청스러운 행동으로 현장은 웃음 바다가 됐다.

송승헌의 장난기는 쉬는 시간에도 발휘된다. 가수 아이유의 팬임을 자청하는 그는 “아이유 노래나 들어야겠다”며 노래 ‘밤편지’를 연신 틀어댄다. “너무 좋지 않아?”라며 동료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확인’ 받는 것도 잊지 않는다. 송승헌의 유쾌한 성격만으로도 ‘블랙’ 촬영장은 웃음이 넘친다.

‘블랙’은 송승헌을 위한 ‘놀이터’다. 시청자를 삼켜버릴 듯한 강렬한 눈빛 하나로 내면을 표현하다가도, 초능력으로 달리는 차를 세우거나 터널 속에선 차에 매달리는 고강도 액션을 선보인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 사이보그처럼 전신 누드(?)의 뒷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더니,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하의실종’ 패션으로 여고 화장실에도 떡 하니 나타난다. “역시 내 입맛엔 내장탕이 최고야!”라며 허겁지겁 내장탕 국물을 들이키는 ‘먹방’까지. 진지한 척 웃기면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며 송승헌이라는 기존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고 있다.

인간 세상에 처음 나온 저승사자 블랙을 표현하는 그의 교감 없는 어눌한 말투와 엉뚱한 대사도 맛깔스럽다. 죽은 자를 보는 강하람(고아라)에게 “내가 보기엔 네 눈은… 뭐랄까, 특별해”하다가 “자세히 보니까 개 눈깔이야!”고 말하는 건 기본이고, 혼자 내장탕을 배달해 먹다 저승사자 007과 416이 쳐다보자 “니들은 안 됐다. 이런 맛난 것도 못 먹고”라는 철없는 소리도 곧잘 한다. 여기에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곁들인다. 문만 있으면 순간이동이 가능하다지만 굳이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코믹 연기는 개그맨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진지함과 코믹함을 겸비한 흥미로운 캐릭터 블랙은 광고계가 먼저 알아봤다. 송승헌의 소속사 더좋은 이엔티는 “현재 얘기가 오가는 광고 출연 계약만 10건이 넘는다”고 전한다.

‘블랙’에서 사람의 몸에 빙의된 저승사자로 등장한 송승헌이 내장탕을 먹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방송화면 캡처
‘블랙’에서 사람의 몸에 빙의된 저승사자로 등장한 송승헌이 내장탕을 먹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방송화면 캡처

“이제야 송승헌의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송승헌에게는 가혹할 수 있는 호평이다. 돌이켜보면 송승헌은 근사한 외모로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 잘생긴 얼굴과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등은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를 ‘멜로 킹’으로 만들었다. 멜로 드라마 속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여주인공에게 그의 외모는 안성맞춤이었다.

KBS드라마 ‘가을동화’(2000)와 ‘여름향기’(2003), SBS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2011)와 ‘사임당 빛의 일기’(2017)을 비롯해 영화 ‘카라’(1999), ‘인간중독’(2014), ‘미쓰 와이프’(2015)에서 송승헌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진지한 ‘순정파’였다. 비슷한 캐릭터를 닮은 꼴로 연기하니 매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일었다. 잘생긴 외모, 멋진 남자 이미지는 그에게 되려 독으로 작용했다.

송승헌이 도마에 오를 때 상대 여주인공들은 빛을 발했다. 무색무취한 송승헌 옆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것이다. 비아냥 섞인 칭찬 아닌 칭찬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 “송승헌은 여주인공만 빛내준다.” 송승헌은 신예였던 송혜교(‘가을동화’) 손예진(‘여름향기’)을 큰 별로 만드는데 힘을 보탰고, ‘인간중독’의 임지연이 두각을 나타내도록 도왔다. 상대 배우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송승헌의 존재감은 약해져 갔다.

수려한 외모의 송승헌이 전화기를 거꾸로 들어 통화하거나 알몸에 겉옷만 걸친 채 앉아 있는 코믹한 설정은 ‘블랙’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방송화면 캡처
수려한 외모의 송승헌이 전화기를 거꾸로 들어 통화하거나 알몸에 겉옷만 걸친 채 앉아 있는 코믹한 설정은 ‘블랙’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방송화면 캡처

‘블랙’을 만난 송승헌은 180도 달라졌다. 뻣뻣하고 우유부단한 왕자님 이미지를 벗고 혼자서 액션, 스릴, 공포, 코믹을 소화해내고 있다. 그의 옆에 찰싹 붙은 고아라가 왜소하게 보일 정도다.

송승헌의 코믹하고도 진지한 모습은 ‘미쓰 와이프’에서 엿보였다. 주인공 연우(엄정화)에 가려 주목 받진 못했지만 그녀의 남편 성환으로 등장해 ‘팬티바람’에 “밥 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아저씨 연기를 무리 없이 해냈다. ‘미쓰 와이프’의 강효진 감독은 개봉 당시 “성환은 다정한 인물이지 코믹한 캐릭터는 아닌데, 송승헌씨가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며 “바지를 가슴까지 추켜올리는 등 깨알 애드리브를 선보여 현장을 즐겁게 했다”고 말했다. 강 감독이 송승헌이 준비한 ‘설정’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송승헌은 ‘미쓰 와이프’에서 펼치지 못한 연기 욕심을 ‘블랙’으로 풀고 있다. ‘하의실종’ 패션 차림으로 신체 주요 부위를 모자이크 처리한 장면도 별 일이냐며 여유 있게 소화했다. 다리를 쩍 벌려 앉은 민망한 포즈는 그의 아이디어가 보태졌다. ‘블랙’ 제작진도 “‘병맛’ 코드를 이렇게 잘 살려낼 줄 몰랐다”며 놀라워할 정도다.

술에 취한 장면을 위해 소주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고, 손으로 배트맨 가면을 만들어 보이거나, 내장탕이 먹고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갈망의 눈빛을 보내는 익살스런 행동들도 송승헌의 즉흥 연기다.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를 척척 해내니 이런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외모에 비해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송승헌이 내려놓음의 미학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것 같다. 50대 60대가 더 기대되는 배우가 됐다.”(김경남 대중문화평론가) 송승헌의 전성기는 이제야 시작된 것 아닐까.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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