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는 베를린 남서쪽 115㎞쯤에 있다. 지난달 27일 열차를 타고 어렵사리 찾아간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역 플랫폼 양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디모데전서, 1장 15절)’,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누가복음, 19장 10절)’라고 쓰인 간판이 홀연히 서 있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덕분으로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성교회(城敎會)에서 ‘95개조 의견서’를 발표하고, 시교회(市敎會)에서 새 전례(典禮)에 따라 예배를 집전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나흘밖에 앞두지 않았는데도, 고색창연한 교회 안팎은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서성일 뿐, 너무 조용하고 깔끔하여 아무 일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첫 인상에는 우리나라 읍보다도 작고 외진 이 도시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은 종교개혁의 발상지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교회 개혁운동으로서, 1,500년 동안 유럽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제도를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탄생시킨 획기적 사건이었다. 수도사이자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였던 루터는 ‘95개조 의견서’에서 가톨릭의 관행과 부패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제32조는 ‘자신이 면죄부를 가지고 있으므로 확실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친 사람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신랄한 내용이었다. 루터는 면죄부를 사고 파는 행위를 마뜩지 않게 여기는 여론을 등에 업고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해 간명하고 정연하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다.
종교개혁은 곧바로 독일을 넘어 유럽 각지로 확산되었다. 종교개혁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믿음 지상주의(信仰義人說)-모든 사람은 율법준수나 면죄부구입이 아니라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은총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만인 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므로 성직자를 통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독실하게 믿음으로써 영생에 이를 수 있다. 셋째, 성경 지상주의(聖經至上主義)-모든 사람은 교회의 교리와 제도가 아니라 성경에 명시된 종교적 규범만을 절대적 권위로 받들어야 한다.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세계의 기독교를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로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세속사회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국가권력의 교회장악이 두드러졌다. 종교개혁은 국가와 교회의 분립을 내세웠지만, 추진과정에서 권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군주들이 교회의 영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둘째, 자본주의의 도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속의 직업도 신이 부여한 소명이라는 직업관, 근면과 검소를 강조한 직업윤리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셋째, 민중의 지적 수준이 높아졌다. 일반인의 성경읽기를 장려하기 위해 교육을 보급하자 식자율(識字率)이 높아지고 지식이 확산되었다. 넷째, 결혼과 가정의 의미가 중요해졌다. 성직자도 결혼하게 됨으로써 가정이 신앙과 수양의 요람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았다. 총체적으로 보아 종교개혁은 근대사회의 출현을 촉진한 셈이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근대화에도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스스로 실행에 옮긴 비텐베르크 시 교회는 훼손 위기에 직면한 모양이었다. 방문객들에게 헌금을 호소했다. 인류역사의 전기(轉機)를 만든 이 세계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발신한 교회조차 유지와 보수가 힘들다면 다른 교회는? 불현듯,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회의 청년신도수가 반으로 줄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이런 상황이라면 500년 후에도 기독교가 지금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년의 역사, 의미, 미래를 곱씹으며 고즈넉한 비텐베르크 거리를 헤맸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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