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지진 직후 전문가들
“비구조물 관리ㆍ감독 강화” 권고
국토부 내진 설계만 확대 그쳐
포항서도 똑같은 피해 반복
지난해 경주 지진 직후 건물 외벽 벽돌과 천장재 등 비(非)구조물의 내진설계 기준과 관리ㆍ감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전문가 집단의 권고를 정부가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매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땜질 처방’으로, 막을 수 있었던 국민들 피해가 더 커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21일 건축업계 등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9월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하자 내진설계ㆍ보강 등과 관련, 대학 교수와 구조기술사 등 전문가 집단과 수 차례 대책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문가 집단은 ▦비구조재에 대한 내진설계기준과 관리ㆍ감독 강화 ▦내진설계 의무대상 건축물 3층 이상에서 2층 이상으로 확대 ▦5층 이하 건축물에 대한 내진설계 구조기술사 확인 의무화 등을 주장했다. 회의에 참석한 한 전문가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지진은 규모가 크지 않아 건물 붕괴보단 벽돌이나 간판ㆍ천장재 등 비구조재가 떨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명ㆍ재산 피해가 더 크다”며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국토부가 경주 지진 발생 9일 뒤 내놓은 지진방재개선대책에는 내진설계 의무대상 건축물을 2층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만 담겼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미 고시된 건축기준에 비구조재 내진 기준이 마련돼 있어 해당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실제 건축기준에는 칸막이 벽에 설치된 유리 등에 대해 수평지진하중(지진으로 인한 수평방향 흔들림)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고 돼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관리ㆍ감독이 전혀 이뤄지지 않으면서 현장에서도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규정은 있지만 사문화한 셈이다. 경주ㆍ포항 지진 피해조사에 나선 한 전문가는 “포항 지진에서도 한동대 건물 외벽 벽돌과 포항역의 천장 마감재 파손 등 지난해 경주 지진 피해상황과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고 지적했다. 한 구조기술사는 “관련 규정만 마련해 놓고 관리ㆍ감독은 뒷전인 현 상태가 계속 되면 비구조재 붕괴로 인한 대규모 인명ㆍ재산 피해는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포항 지진 부상자 90명 중 중상자 6명은 지진 당시 무너진 벽돌이나 천장 등에서 추락한 파편에 다친 이들이다.
이에 따라 국토부는 뒤늦게 비구조재 내진 기준과 관리 방안을 강화하기로 하고, 최근 국토부 산하기관인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에 관련 연구 설계를 맡겼다. 국토부 관계자는 “내년 연구용역 결과 등을 바탕으로 비구조재 내진설계 기준을 어떻게 개선할 지 살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5층 이하 건축물은 내진설계 검증이 비전문가(건축사)에게 맡겨져 있어 서민주거 공간인 다가구ㆍ다세대 주택이 지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지적(본보 17일자 2면)에 대해서도 “관련 규정을 어떻게 바꿀 지 이른 시일 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한 건축구조 전문가는 “지난해 경주지진 이후 전문가 집단이 제안한 내용을 무시했다 이제야 검토하겠다고 부산을 떠는 모양새”라며 “사고 직후 가시적 대책을 내놓는데 급급한 나머지 관련 규정의 실효성과 현장의 목소리가 간과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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