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기일식을 직접 본 것은 지난 8월 미국일식이 처음이었다. 일식이 일어나는 원리는 중학교 정도의 과학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태양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이 세상은 더 이상 내가 조금 전까지 살던 세상이 아닌 듯했다. 대자연이 펼치는 장엄한 우주쇼는 인간이 심심찮게 우주로 나가는 21세기에도 그 대단한 우리 인간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천상의 비밀을 잘 알지 못했던 왕조시대에는 일식이 분명 국왕에게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겨졌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면 왕과 신하들이 흰옷을 입고 해나 달이 다시 나오기를 기원하는 의식인 구식의(救蝕儀)를 올렸다고 한다. 1422년 세종4년 음력 1월1일 일식이 있었다. 이날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소복차림으로 구식의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일식은 예고된 시각보다 15분 늦게 시작되었다. 천문관측을 담당했던 서운관의 관리 이천봉은 잘못된 예측으로 임금을 추위에 떨게 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1432년 정월초하루에도 일식이 있을 것으로 예보되었으나 결국 이날 일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를 다룬 어느 TV 드라마에서는 끝내 일식이 일어나지 않자 세종의 정책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하늘마저 왕을 버린 게 아니냐며 세종을 몰아세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선덕여왕을 소재로 한 또 다른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황녀였던 미실(未實)은 역법에 밝은 스님의 도움으로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고 이를 무기 삼아 황실을 위협해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는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이용해 정적을 공격하고 정치적인 이득을 얻는다는 에피소드는 이처럼 수백 년 전을 다루는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지난 11월15일 규모 5.4의 강진이 포항을 강타해 온 국민을 공포와 충격에 빠뜨렸을 때, 국회 제1 야당의 한 최고위원이 “이번 포항지진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하늘의 엄중한 경고 그리고 천심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본인은 그런 일부의 의견 내지 지적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부 그런 의견 내지 지적이 나왔을 때, 그런 주장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상식과는 맞지 않다고 점잖게 타일렀어야 하지 않을까?
과학은 주술과 신화, 미신과의 결별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600년대의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따져 물으며 고대 자연철학의 길을 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비슷하다. 지진 발생 뒤의 대처가 적절했는지, 이재민의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 활성단층 조사는 잘하고 있는지, 평소 자연재해에 대한 준비사항에 소홀함이 없는지, 하늘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대통령에게 꼭 전달해야 할 의견과 지적은 넘쳐난다.
이 뉴스를 처음 듣고서 어떻게 제1 야당의 최고위원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의 경고’ 자리에 ‘북한의 위협’을 대입해 보니 내 생애 50년 가까이 들어왔던 익숙한 레토릭이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위협 때문에 군사반란을 일으켜야 했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광주시민을 학살해야 했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대통령을 탄핵해서는 안 되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적폐를 청산하면 안 된다... 며칠 전에는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군 사이버사령부 여론조작 혐의로 구속되자 북한 김정은이 가장 싫어했던 군인을 꼭 구속까지 해야 하느냐는 의견이 보수언론과 일부 야당에서 흘러나왔다. ‘북한의 위협’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북한의 위협이 특정 사안에 어떤 인과관계로 작동해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학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한국 정치에는 ‘데우스 엑스 북한’이 있다. 과연 김관진을 구속시킨 것이 북한에 더 이로운지, 아니면 예컨대 공군 활주로를 틀면서까지 초고층 건물을 허가해 준 전 대통령이 북한에 더 이로운지 그 정도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시스템이다. 한두 명의 슈퍼히어로가 유지하는 체제가 아니다. 스포츠에서도 1군과 2군의 실력차가 적을수록 강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북한의 기형적인 왕조체제보다 더 우월한 이유는 아주 대단한 군인 한두 명을 감옥에 집어넣더라도 국방에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와 어울리는 국가운영은 증거기반 거버넌스이다. 정치의 영역에도 최소한의 과학원리가 작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1432년의 세종은 서운관 관원을 처벌하는 대신 조선의 하늘에 맞는 역법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칠정산’이다. ‘하늘의 경고’나 ‘북한의 위협’ 같은 주술정치의 망발을 들을 때마다 조상님 대하기가 참 부끄럽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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