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 방법ㆍ시간ㆍ담당자 등 제한
호주선 ‘1회 10분’ 상담시간 줄여
일본, 악성민원 경찰서 통보 조치
美선 다툼 판단 사법절차로 해결
성희롱ㆍ폭언 고객전화 먼저 끊는
국내 기업 ‘엔딩 폴리시’도 성과
감정노동자 보호법 국회통과 눈앞
방치돼 온 민원문화 개선 기회로
독일 정부는 최근 4차 산업혁명(industry 4.0) 개념을 제시하면서 노동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노동 4.0(Arbeiten 4.0)’ 백서를 발간했다. 독일 정부는 노동 4.0 세계에서도 화학적 위험물질 등 신체적 요소뿐 아니라 지나친 요구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요소 등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규정한다. 이와 관련해 독일에서는 감정노동 관련 직종에서 요구되는 인간 상호작용 등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공공서비스 민원 처리원 등 감정노동 종사자의 건강보호는 노동자 권리 보장 차원에서 외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사회문제다. 특히 주요 선진국에서는 공공행정 영역의 악성민원을 행정력 낭비 등 사회적 손실로 보고 별도 관리 기준과 대응 지침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하는 추세다.
2000년대 중반부터 ‘고질민원’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지방행정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영국은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구체적 근거 제시를 거부하거나 ▦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절차를 위반해서라도 먼저 처리해 달라고 우기거나 ▦욕설, 폭언을 하거나 ▦같은 사안을 다른 관련 기관에 반복적으로 민원 제기한 경우 등을 고질민원으로 분류한다. 영국 지방정부는 고질민원인에 대해 일정 기간 동안 지방정부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 시간, 담당 공무원 등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한다. 예를 들면 매주 수요일 오전에만 전화 상담을 허용하는 식이다.
호주 역시 고질민원인이 연락할 수 있는 직원을 한정하거나 ‘전화통화 1회 10분, 면담 최대 45분’으로 상담 시간을 제한하는 등 악성민원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일본은 약 5,000명의 행정상담위원이 지역 주민 고충을 듣고 이를 행정기관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상담위원이 주민 고충을 직접 듣기 때문에 고충 실상의 이해도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는 행정상담위원 활동과 별개로 악성민원 발생 시 청사 관리자와 상담해 관할 경찰에게 통보하는 등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사법부 권위가 높은 미국은 악성민원을 공공행정 영역에서 해결하기보다는 정부기관과 개인 간 분쟁으로 보고 사법절차를 거쳐 해결하는 편이다. 민원인이 거짓으로 민원을 제기한 경우나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민원을 제기한 경우 미국 법원은 민원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악성민원에 대한 국내 대응은 2012년에 선진국 사례를 본뜬 대응 매뉴얼이 처음 마련된 정도로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최근에는 감정노동의 공적ㆍ제도적 지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는 분위기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1월 지자체 최초로 ‘감정노동 종사자의 권리보호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같은 해 11월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 종합계획을 발표하는 등 감정노동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서울시 노동권익센터 내에서 시범 운영 중인 ‘감정노동권리보호센터’를 내년부터는 독립센터로 격상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감정노동자 보호는 곧 기업과 기관의 능률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이정훈 서울노동권익센터 감정노동보호팀장은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업무상 권한과 자율성을 높이면 이직이 줄고 숙련도가 좋아져 경영 효율이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민간에서 감정노동에 적극 대응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현대카드ㆍ현대캐피탈의 엔딩 폴리시는 상담원의 장기 근속으로 이어졌다. 2012년 2월부터 상담원이 성희롱, 폭언을 일삼는 고객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게 해 온 현대카드는 지난해 8월 이 제도를 성희롱 외에 인격 모독이나 위협적 발언에도 전화를 끊을 수 있는 ‘엔딩 폴리시’로 확장했다. 현대카드 측은 13개월 이상 장기간 근무해 상황 대응력이 뛰어난 고역량 상담원 비중이 전화를 먼저 끊는 매뉴얼 도입 직후인 2012년 39%에서 지난해 8월 58%로 큰 폭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다행히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인 ‘감정노동자 보호법’의 연내 통과 기대도 높아 ‘민원 에티켓’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해 11월 대표 발의한 감정노동자 보호법안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감정노동 종사자 건강보호 핸드북’ 내용과 유사하게 감정노동의 개념과 관리 필요성, 감정노동 종사자를 위한 건강보호 조치사항 등을 담고 있다.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통과되면 법적 토대가 마련돼 감정노동자의 인권 보호와 방치돼 온 민원문화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다만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또 다른 감정노동자 관리ㆍ통제법이 되지 않도록 현장 목소리를 제대로 담은 시행령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k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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