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내가 조각해야 할 거대한 돌덩이다. 내가 오늘이라는 시간 동안 절차탁마 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이 돌덩이를 내가 염원하는 숭고하고 매력적인 작품으로 만들 것이다. 인류는 이 돌덩이를 통해, 문명과 종교를 일구었다. 제우스신이 독수리 두 마리를 보내 세상을 창조할 최적의 장소를 물색한다. 두 독수리는 그리스 델피의 ‘옴팔로스’에 커다란 돌덩이를 발견하고 우주의 배꼽으로 삼았다. 유일신 종교의 조상인 이브라힘은 그의 맏아들 이스마일과 함께,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건축했다는 거룩한 지경을 찾아 헤맨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홍수로 사라졌다는 거룩한 성소를 재건하였다. 이것은 이슬람 성지 메카에 있는 검은 돌 ‘카바’다. 델피에는 “너 자신을 알라”, “무리하지 말라” 그리고 “못 지킬 약속은 하지 말라”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이 글에 담긴 정신은 서양문명의 자궁이 되었다. ‘카바’는 지상에서 신을 만나는 장소다. 이슬람교인들의 이곳을 통해 삶의 방향과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
인간은 눈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관찰하게 되어있다. 인류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타인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류는 최근 자신을 심오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을 낯설게 만들어 자신의 심연에 숨어있는 내면을 보았다.
19세기 미국 사상가인 R.W. 에머슨은 1841년에 쓴 ‘자립(Self-Reliance)’이란 에세이를 썼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라틴어문구로 시작한다. “네 테 쿠아이시베리스 엑스트라(Ne te quaesiveris extra)”. 해석하면 “당신은 당신과 상관없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이다. 인간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들을 자신의 삶에서 덜어내면서, 현대를 열었다. 현대 사상가들이나 예술가들의 ‘위대함’은 자신을 심오하게 보는 연습에서 나온다. 그들은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길’을 거침없이 탐구한다. 에머슨의 라틴어 문구를 풀면 이렇다. “당신은 인생에서 추구할 그 무언가를 발견했습니까?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소문과 같은 엑스트라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식이고, 더욱이 흉내 내는 것을 자살행위입니다. 당신 스스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십시오.” 인간은 20세기에 들어, 자신이 스스로에게 3인칭이 되어 3인칭이 된 자신을 섬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20세기에 등장한 이 관찰의 기술을 ‘추상(抽象)’이라 부른다. ‘추상’은 그 대상에 대한 맹목적 모사(模寫)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추상’이란 의미의 영어단어 ‘앱스트랙트(abstract)’에서 짐작할 수 있듯, ‘쓸 데 없는 것을 빼는 행위’다. 인간의 행동은 평상시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나의 얼굴, 몸가짐, 내가 처한 운명은 내 생각이 만든 환경이다. 나는 형태가 없는 돌덩이와 같은 미래를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두 손에 정과 망치를 들고 마음속에 그려놓은 생각을 조각하기 위해, 쓸데없는 군더더기 돌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정교하게 쪼아내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라는 조각품은 남들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때 빛이 날 것이다. 생각은 내 손에 쥐여 있는 정과 망치를 통해 어제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구태의연함을 쪼아버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여 내 생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그러면, 내가 만들어낼 조각품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정을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인류는 ‘모사’라는 장르를 카메라에게 넘겨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사용한 ‘미메시스’는 ‘모사’나 ‘흉내’가 아니라 ‘재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그리스 비극을 ‘행위에 대한 재현’이라고 정의했다. 이 ‘재현’은 비극 배우의 ‘공포’와 ‘연민’이라는 특별한 감각을 통해 발휘된다. 20세기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일구어 낸 과학, 예술, 그리고 철학을 통해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듯 착각했다. 비극은 오만이 낳은 자식이다. 인류는 20세기 초 유럽 한 복판에서 인류 최악의 비극인 두 차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벽한 재현을 위한 시도를 ‘스푸다이오스(spoudaios)’라는 고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스푸다이오스’를 번역하자면 ‘심각(深刻)’이다. ‘심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한없이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하는 행위다. ‘심각’이란 어두운 얼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 내 자신에게 감동적인 나를 위해, 내게 주어진 하루를 ‘깊이 새겨’ 작품으로 만드는 희망찬 포석(布石)이다. 온갖 하찮은 웃음거리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오늘만은 정색을 하고, 심각하고 싶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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