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예산은 전액이 특수활동비
비밀주의에 총액조차 파악 못해
편성땐 비밀 보장, 결산 심의 철저히 해야
전직 수장들이 줄줄이 뭉칫돈을 청와대에 상납한 사실이 드러나며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또 다시 ‘위기’에 몰렸다. 댓글 조작과 블랙리스트가 정보기관 존재 의의를 의심케 한 악행이었다면 특수활동비를 빼돌려 뇌물로 제공한 비행은 대북ㆍ대외 정보 역량을 망친 ‘자해행위’였다. 예산 당국과 국회 통제를 받지 않는 지독한 예산 비밀주의가 근본 원인으로 지적된다. 안으로는 독립 감사기능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국회 사후 결산과 관리 감독 등을 철저히 해야 이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제안이다.
국정원 예산의 특징은 외형상 전액이 특수활동비로 분류된다는 데에 있다. 특수활동비는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정보ㆍ수사 또는 이에 준하는 국정수행에 소요되는 경비를 말한다. 비밀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정부 예산과 달리 집행방식에서 자율성이 보장되고, 특별한 경우에는 어디에 썼는지 증빙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특히 지난해 결산보고서상 국정원 예산(특수활동비) 총액은 4,860억원인데, 국정원법에 따라 정보활동 경비를 다른 부처 예산으로도 올릴 수도 있어 실제 국정원이 쓰는 돈은 이보다 2배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여연대는 2018년 예산안 가운데 국정원이 타 부처 특수활동비를 직접 기획하고 조정한 금액만 1,900억원이 넘는 것으로 확인했다.
편성과 결산 단계에서도 국정원은 특혜를 받는다. 다른 부처들은 1년간 구체적으로 어디에 돈을 쓸 지를 1원까지 낱낱이 예산당국에 제출해야 하지만, 국정원은 기획재정부에 총액만 낸다. 더구나 국회법은 국정원 예산의 심사와 결산을 예산결산심사특별위원회가 아닌 정보위원회 권한으로 위임하고 있다. 예결위조차 총액만 알 수 있다.
정보위 소속 의원들도 세부 내역서를 볼 순 있지만 별도 열람실에서 혼자 봐야 한다. 그나마도 국정원은 정보위에 밝히기 곤란한 문제는 국정원법상 ‘방패 조항’(증언 및 자료제출 거부권)을 활용한다.
전문가들은 감사원, 국회 등의 다양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특히 어디에 돈이 쓰일 지를 미리 예측하기 어려운 정보기관의 특성상 ‘편성’보다 ‘결산’ 단계에서 확인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도진 중앙대 교수는 “국정원 예산은 삭감보다는 집행 내역에 대한 관리가 더 중요하다”며 “국회 정보위에서 특수활동비에 대해 보고를 받고 승인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국방부도 비밀 업무가 수두룩하지만 감사원 감사를 다 받는다”며 “지금처럼 감사원 감사나 사후 결산을 제대로 안 받으려 하니까 자꾸 직원들이 감옥에 가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비밀이 필요한 부분만 특수활동비로 하고 통상 예산은 다른 부처처럼 공개하는 대안도 나온다. 이미 국정원 예산 중에서 조직 관련 예산 및 비밀활동비만 총액으로 요구할 수 있게 하는 법안(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계류돼 있다.
한희원 동국대 교수는 “당파적 대립이 치열한 국회가 국정원 예산을 통제하는 일은 위험하다”며 “정보ㆍ예산 전문가들로 구성된 외부 통제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외부 감독기관은 정보기관에 대한 전문성이 약해 옥상옥이 될 우려가 있는 만큼 국정원장으로부터 독립된 내부 감사관이 사후 관리를 통제하는 게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청와대 상납 사건의 여파로 특수활동비와 관련한 제도 개선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와 관련 현재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특수활동비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논의 중이다. 위원회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정보위 심사를 강화하고 예결위의 심사를 받도록 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박준석 기자 pjs@hankookibo.com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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