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달 초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도중 ‘깜짝 사임’ 의사를 밝힌 뒤 계속해서 이곳에 체류 중인 사드 알 하리리 레바논 총리를 프랑스로 초청했다. 이란과 중동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는 사우디가 친(親)이란 레바논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를 견제하기 위해 하리리 총리의 사퇴를 강요했다는 해석이 힘을 얻으면서, 이슬람 수니파(사우디)와 시아파(이란) 간 긴장이 급속히 고조되자 적극적인 중재를 자처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국제사회 영향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이 대신 지구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꿰차려는 행보로 귀추가 주목된다.
15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독일 본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총회(COP23)에 참석한 마크롱 대통령은 취재진에게 하리리 총리와 그의 가족을 초청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대통령실은 공식 성명을 통해 마크롱 대통령이 사우디 모하메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 하리리 총리와의 전화통화를 거쳐 이같이 결정했다면서 “며칠 내에 하리리 총리와 가족이 파리에 도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구체적인 도착 날짜와 체류 기간 등은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하리리 총리가 이끄는 정당인 미래운동(FM) 소속 오카브 사크르 의원은 파이낸셜타임스에 “48시간 내 총리가 파리에 당도할 것”이라며 “현재 위기 상황에서 레바논의 입장을 유럽과 아랍국가들에 설명하고자 향후 다른 나라도 추가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초청은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중동 지역에서 ‘중재자’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앞서 그는 하리리 총리의 전격 사임 발표(4일)와 강제퇴임설, 사우디 억류설 등으로 긴장 국면이 조성되자 9일 밤 사우디를 급거 방문한 바 있다. 과거 레바논을 식민통치했던 역사적 경험 탓에 계속 유대관계가 있는 프랑스의 ‘갈등 조정’ 역할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하리리 총리도 수년 간 프랑스에 체류 경험이 있어 심리적으로도 멀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사우디가 레바논 총리를 억류했다는 우려를 해소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다만 정치적 망명 제안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때문에 하리리 총리의 이번 프랑스행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중동은 물론,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날 친헤즈볼라 인사인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하리리 총리는 사우디에 억류돼 있고, 이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처음으로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하리리 총리가 이날 트위터에서 재차 “나는 아주 잘 있다. 사랑하는 레바논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억류설을 부인했으나, 레바논 현지에선 여전히 그가 사우디의 압력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인질’로 잡혀 있다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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