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소업체가 판매 대행하는 구조
대형사, 입금 지연까지 눈감아
지난달 부산서도 신혼부부 피해
950명 경비 10억 들고 도주한
하나투어 판매대리점주 체포
“국내에서 최고 여행사라고 해서 믿고 계약했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할 수가…”
경기 고양에 사는 최모(62)는 요즘 한숨이 부쩍 늘었다. 최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과 해외여행 한번 갈 요량으로 조금씩 돈을 모았다. 출국 일을 일주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여행상품을 예약한 하나투어의 판매대리점에서 횡령사건이 발생해 피해를 접수하라는 내용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
그는 “국내 최대 여행사인 하나투어에 예약한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피해를 접수하라는 문자에 어이가 없었다”며 “하나투어측이 고객들의 피해가 없도록 책임지겠다고는 하지만 모처럼 여행이 엉망이 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국내 여행업계 1위인 하나투어의 한 대리점 대표가 최근 고객들이 낸 여행경비 10억원을 갖고 잠적한 사건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다. 현재까지 발생한 피해자만 1,000명에 육박하고 있어 향후 피해자가 늘어날 수 있어서다.
여행사의 이른바 고객 돈 먹튀 사고는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한 여행사 대표가 신혼부부 12쌍이 낸 여행경비 3,500만원을 들고 잠적했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지난해 대구에서도 고객 100여명의 해외여행 경비 1억5,853만원을 횡령한 여행사 대표가 검거됐다.
여행사가 고객돈을 횡령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데도 근절되지 않는 근본적 문제는 대형 도매 여행업체의 여행 상품을 소규모 여행사들이 대행ㆍ판매하는 구조 탓이라는 시각이 많다. 판매점들이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 변칙영업을 하는가 하면 고객들의 여행 경비도 즉시 입금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대형 여행사들이 고객유치를 위해 부실한 여행사까지 문어발식으로 모집, 상품 판매를 맡기는 것도 문제다. 판매점이 여러 여행사 상품을 판매할 경우 본사가 고객들의 경비를 즉시 입금하지 않는 판매점에 대해 강하게 제재 못하는 실정이다. 본사가 오히려 판매점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대형여행사가 대리점에 취하는 사기 피해 조치라고는 사실상 보증보험 가입 확인 등이 전부다. 이렇다 보니 판매점이 고객 돈을 빼돌리려고 저가 상품을 파는 등의 일을 꾸민다면 이런 사고는 재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여행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군소 여행업체의 난립을 방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광진흥법 시행령에 따르면 현행 여행업은 일정 금액과 사무실만 있으면 영업이 가능한 신고제이다. 이 때문에 대표자 자격요건, 자본력 등의 검증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신동일 경복대 국제관광학과 교수는 “대리점을 끼고 상품을 파는 여행사들이 사고 재발을 위한 전체 대리점에 고객 가상계좌 등을 구축해야 한다”며 “소비자들도 지나치게 싼 여행상품이나 개인 명의의 계좌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횡령사건을 수사중인 파주경찰서는 15일 파주와 고양 일산에서 하나투어 판매대리점을 운영하면서 고객 950명이 입금한 여행경비 약 10억원을 챙겨 도주한 A(35)씨를 체포해 조사 중이다.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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