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을 상대로 한 ‘남중국해 외교전’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우위에 섰다. 중국은 중재자를 자임하고 나선 미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세안과 우발적 충돌 방지 로드맵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중국과 아세안이 의기투합하면서 미국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14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전날 아세안과의 정상회의에서 우발적 충돌을 비롯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악화를 막기 위한 행동준칙(COC) 제정 협상에 공식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또 향후 10년간 남중국해 연안ㆍ해양 자원의 보호를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도 채택했다. 이날 발표된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 성명에도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과 군사기지화는 언급되지 않은 채 ‘항행의 자유’와 함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강조하는 내용만 담겼다.
중국과 아세안의 이번 합의는 남중국해 사태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될 만하다. 2002년 11월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 행동선언’(DOC) 채택 후 15년 만에 분쟁 악화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게 됐기 때문이다. 양측은 이미 지난 8월 외무장관 회의에서 기본 틀에 합의한 상태다. 세부 내용과 구속력 등을 놓고 막판 진통도 예상되지만 리 총리와 아세안 10개 회원국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정상회의를 열기로 한 만큼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이 전기를 맞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 합의는 특히 중국에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시진핑(習近平) 2기 체제 출범 후 열린 첫 다자회의 외교전에서 미국에 완승을 거뒀다는 점에서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남중국해 분쟁 조정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며 스스로를 ‘매우 훌륭한 조정자이며 중재자’라고 강조했지만, 아세안 국가들은 이를 철저히 외면한 채 곧바로 중국과 COC 제정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당사국 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미국과 서방의 개입을 경계해온 중국의 입장이 온전히 반영된 셈이다.
베이징(北京)의 한 외교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불균형 해소에 집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예봉이 무뎌진 상황에서 권력서열 1,2위가 동시에 동남아를 방문해 당사국들을 설득한 중국의 전략이 주효했다”면서 “시진핑 국가주석 입장에선 제19차 공산당대회에서 표방한 신형국제관계의 한 축인 주변국과의 선린외교 구축에서도 상징적인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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