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포함 모두 이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 20대 총선을 코 앞에 둔 2016년 3월 6일,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사방에 적뿐인 광야”에 있다며 밝힌 비장한 결의다. 갓 창당한 국민의당은 김종인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의 통합 공세에 밀려 지지율이 한 자리수로 곤두박질하며 거의 소멸 단계에 몰려 있었다. 당내에서도 김한길 상임공동선대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통합론이 거셌다. 야권이 분열하면 총선 참패가 뻔하고 결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 온다는 위기감이 범 진보진영에 팽배하던 때였다.
▦ 그래도 안철수는 마이웨이를 고집했고, 결국 20대 총선에서 38석(지역 25, 비례 13)을 얻었다. 호남은 거의 석권하다시피 했고, 비례대표 전국 득표율에서는 근소하게 민주당을 앞섰다. 국민의당이 보수표를 갈라치며 선전한 덕분에 민주당이 제 1당을 차지했고, 3당 체제의 출현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거쳐 문재인 정부 탄생으로 이어지게 한 정치적 환경과 토대가 됐다. 민심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두려운 광야에서 죽어도 좋다는 결의로 독자노선을 고수한 안철수를 빼고 얘기할 수 없는 과정이다.
▦ 두 차례 집단탈당을 거치며 군소정당으로 쪼그라든 바른정당 새 대표로 유승민 의원이 선출됐다. 유 신임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원내교섭단체가 무너져 춥고 배고픈 겨울이 시작됐다”면서 “강철 같은 의지로 이 죽음의 계곡을 건넌다면 어느새 겨울은 끝나고 따뜻한 새봄이 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죽음의 계곡’은 안철수의 ‘광야’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은 2016년 총선 직전 안철수가 처한 상황 못지 않게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 이 땅의 진짜 보수, 개혁 보수를 추구하는 유승민의 꿈은 야무지다. 일단 중도 보수 통합으로 세를 모으고 활로를 찾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당 안팎 상황은 여의치 않다. 정치인들은 대의와 명분을 앞세우다가도 다음 선거 당선 문제가 걸리면 냉정하게 돌아선다. 남아 있는 11명 의원 중에 이탈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대표는 유 대표의 신임 인사예방조차 거절했다. 졸렬한 작태지만 정치의 세계는 냉엄하다. 유승민이 과연 이런 죽음의 계곡을 무사히 지나 새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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