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자들은 서구 인문의 원형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찾곤 한다. 그런 역할을 한 텍스트를 고대 중국에서 찾으라면 필자는, 공자가 편찬한 ‘춘추’에 좌구명이 해설을 단 ‘춘추좌전’을 들곤 한다.
물론 제목이 시사해 주듯, 이 책에는 춘추시대의 역사만 실려 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 속에 천 년의 고된 세월마저 이겨낼 형상과 동력이 담겨 있듯이, 여기에는 후세에 파란만장하게 펼쳐진 중국 인문의 추형과 원천이 오롯이 담겨 있다. 마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 서구의 인문이 빼곡하게 배태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춘추좌전’을 두고 중국 인문의 원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그렇다고 ‘춘추좌전’에 멋지고 본받을 만한 인물과 일만 실려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영웅들의 위대한 서사시’라고 불리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 인간의 갖은 결점과 오점이 함께 실려 있는 것처럼, ‘춘추좌전’에도 인간사 오만 추악함과 삿됨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당연히 후세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역사를 익힘은 과거의 잘잘못을 성찰하여 현재를 개선하고 미래를 능동적으로 구성해가는 활동 그 자체이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편찬하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고 증언했다. ‘난신’은 당시 기축 사회제도였던 봉건제적 신분질서를 어긴 신하를 가리킨다. 지금으로 치자면 민주주의와 법치 이념을 능멸하며 탈법과 위법을 자행한 이들이 해당된다. ‘적자’는 패륜, 그러니까 인륜을 어긴 자들을 말한다. 우리 사회로 치자면 인권이나 평화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한 이들이 이에 해당된다. 공자는 이런 삿된 행위가 반복되지 않게 하고자 난신적자의 행위를 기록함으로써 그들을 역사에 길이 고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난신적자가 역사책에 자기 악행과 악명이 기록된다고 하여 벌벌 떨 줄 아는 이들이었다면, 그 정도로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양식 있고 소양 있는’ 자들이었다면 과연 패악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도 쉬이 목도할 수 있듯이, 절대 다수의 난신적자는 자신이 정의라고 여기지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이후로도 현실에선 난신적자가 꾸준히 양산된 까닭이다. ‘춘추좌전’은 그 서명을 아예 ‘난신적자 열전’으로 바꿔도 무방할 정도가 된 연유다. 그만큼 현실 속 난신적자는 벌벌 떨기는커녕 그 위세를 더해가며 떵떵거리고 있었음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춘추’를 편찬하여 난신적자를 대거 기록하고, 좌구명이 그들의 악행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힌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장차 위정자가 될 후손에게 베푼 도덕적 경계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패륜의 끝을 보여주는 장면마저 ‘알차게’ 담아놓은 그 의도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언급은 참조할 만하다.
예(禮)란 나라를 수호하고 정책과 법령을 집행하며 백성을 잃지 않는 근거다. 지금 노나라는 정책과 법령이 신하인 대부에게 장악됐음에도 군주인 소공이 이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소공은 빼어난 인물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대국과 맺은 맹약을 어기고 작은 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남의 불행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기고 자신의 사사로운 행위는 모른 채한다[‘춘추좌전’ 소공(昭公) 5년].
노나라에서 난신적자가 활개 치게 된 원인을 분석한 대목이다. 예컨대 계손씨 같은 난신적자의 발호는 무능하고 몰염치한 군주 소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좌전’에 실린 난신적자 관련 기사를 유심히 보면 대개는 난신적자보다 앞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이 먼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난신에 앞서 ‘난군(亂君)’, 그러니까 나라를 혼란케 하는 군주가, 적자에 앞서 도적 같은 아버지인 ‘적부(賊父)’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혼에는 탐욕만이 잔뜩 들어찬 함량 미량의 인물들이 먼저 나타나 상황을 오도했기에 난신적자가 도리어 큰소리쳐대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자와 좌구명이 역사 기술을 난신적자 열전으로 펼쳐낸 의도와 조우하게 된다. 난신적자가 어떤 환경에서 배출되는지를, 또 그들이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하며 후세의 난신적자를 재생산하는지를 밝히고자 했음이다. 그럼으로써 난신적자의 출현을 막거나 최소화하려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 의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난군적부’가 먼저 있어서 그렇게 됐으니, 그 상황에선 난신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그들을 이해해주자는 주장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남이 도둑질했다고 하여 자신이 저지른 도둑질이 정당화될 수 없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그래서 난신적자와 그들이 저지를 적폐의 청산은 응당 난신적자가 재생산되지 못하도록 이를 윤리적, 법적, 제도적 차원서 방지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고도 치열하게 수행돼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난신적자가 거듭 출몰하며, 자기가 정상인 양 국면을 호도하는 비정상이 더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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