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우선주의’가 美 영향력 약화 속
中 “세계화 수호자” 빈 공간 파고들어
아시아 군비 확장 경쟁 촉발 우려도
21세기 들어 미국 대통령으로선 최장의 아시아 순방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면서 글로벌 권력 지형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9일 세기의 담판으로 주목받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을 보며 “중국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말한 순간이 미중 관계의 역사에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ㆍ전환점)라는 평가(뉴욕타임스ㆍNYT)까지 나왔다. 미국이 이끌고 중국이 끌려오는, 그간 말만 무성했던 G2(주요 2개국)시대가 양국간 협력과 경쟁이 본격화하는 실질적인 단계로 변하는 시대 조류를 스냅 사진처럼 포착한 상징적 장면이라는 얘기다.
달리 보면 이는 미 주류 정치의 이단아로 미국의 외교 규범을 뒤집어온 트럼프 대통령과 19차 당대회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 이후 최고의 권력을 구축했다는 시 주석, 두 개성 강한 지도자의 케미스트리로 세계 질서를 이끄는 ‘트린핑(Trinpingㆍ트럼프와 시진핑의 합성어) 시대’의 도래에 다름 없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그는 특별한 사람이다” 라며 시 주석을 상찬한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폐막 후 하노이로 이동하는 전용기 안에서 기자들과 만나서도 “그를 많이 좋아한다” “서로가 엄청난 감정을 갖고 있다”는 등 시 주석에 대한 호감을 수차례 드러냈다. 미중간 골 깊은 무역불균형, 지적 재산권 분쟁에다 북핵 문제와 남중국해 분쟁 등 국제적 이슈도 두 지도자의 교감을 바탕으로 극한 마찰 대신 최대한 협력을 통해 해법을 찾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트린핑 시대’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시 주석의 리더십 구축이 맞물린 결과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위상 자체를 스스로 약화시킨 데 따른 시대 조류의 성격도 강하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전세계 대비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50%를 넘을 정도의 압도적 강대국의 지위에서 후퇴하긴 했으나 지난해 GDP 기준 24.7%로 중국(14.9%)에 비해 여전히 우위에 있다. 오랜 기간 민주주의 전파자로서 축적된 소프트파워와 세계 경찰로서의 하드파워를 겸비해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그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 한중일 순방에서 무기 판매나 투자계약 체결 등 세일즈 대통령의 면모만 부각시키다가 10일에는 급기야 APEC 최고경영자 기조연설에서 다자무역 체제를 비판하고 보호무역주의 성향을 재차 드러낸 것을 두고 미국 내부에서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미국 자체가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고 NYT도 “미국 우선주의가 아시아 지도자를 당혹케 하고 있다”고 전했다. 11일 아시아 11개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를 선언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것도 미국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빈 공간을 빠르게 파고드는 것은 시 주석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대조적으로 APEC 연설에서 “개방은 발전을 가져오고, 문을 닫는 이들은 필히 뒤처질 것”이라며 미국을 대신해 세계화의 주창자로 나섰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포괄하는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 창설도 주도하고 있다. 이번 순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황제급 예우를 받았지만, “실제 스토리는 커지는 중국의 힘과 미국의 후퇴”(로저 코헨 NYT 칼럼니스트)를 보여준 여정이 된 셈이다.
이 같은 비판이 단순히 미국의 영향력 축소라는 자국주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중국 전문가인 오리아나 마스트로 조지타운대 교수는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 보다 훨씬 훌륭한 솜씨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중국은 자국 이익을 넘어 세계 각국이 혜택을 입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 여전히 실패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는 중국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정치 시스템상 미국을 대체할 만한 이념적 가치와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국제적 리더 국가가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얘기다.
‘트린핑 시대’는 미중 양강이 마찰 보다는 협력을 추구할 여지를 키운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보면 양국이 호혜적인 국제 규범을 창출하기 보다는 철저히 자국의 실리를 추구해 국제 정치 무대는 더욱 냉혹해질 공산이 크다. 미국의 영향력 축소로 인해 아시아 지역에서 군비 확장 경쟁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국이 어설픈 균형 외교를 추구하다간 미중 양측으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 있어 더욱 고도화된 외교 전략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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