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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시 소년, 테니스 왕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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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시 소년, 테니스 왕자되다

입력
2017.11.12 16: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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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이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젠 파이널 결승전에서 정상에 오른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밀라노=AP 연합뉴스
정현이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젠 파이널 결승전에서 정상에 오른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밀라노=AP 연합뉴스

“’교수님’이 넥스트 젠 챔피언이 됐다.”

평소 안경을 쓰고 경기에 임하는 정현(21ㆍ랭킹54위)을 두고 해외 언론들은 ‘교수님’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7세 때 약시 판정을 받았고, ‘눈에 편안한 녹색을 많이 보라’는 안과의사의 권유를 받고 테니스에 입문했다. 테니스 선수로는 드문 일이지만, 그는 세간의 걱정과는 달리 안경을 쓰고 경기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수 차례 밝힌 바 있다. 이제는 경기 도중 안경을 벗고 땀을 닦은 뒤 다시 안경을 쓰고 코트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정현이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젠 남자프로테니스(ATP) 파이널(총상금 127만5,000달러) 결승전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20ㆍ37위ㆍ러시아)에게 3-1(3-4<5>, 4-3<2>, 4-2, 4-2)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ATP투어에서 한국 선수가 정상에 오른 건 2003년 이형택(41)의 아디다스 인터내셔널투어 우승 이후 14년 10개월만이다. 박용국(NH농협은행 스포츠단장) 테니스 해설위원은 “ATP투어 대회 우승은 남자골프 PGA투어 우승에 비견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투어 출전 선수 자체가 극소수인 한국에서 ATP 챔피언에 나왔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대회는 21세 이하 선수 가운데 세계랭킹이 높은 8명이 출전해 최강을 가리는 경연장이다. 세계 랭킹 54위인 정현은 출전 선수 8명 가운데 6번 시드에 불과했고, 아시아 선수는 정현이 유일했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되자 상위 랭커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5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정현은 우승상금 39만달러(4억3,000만원)를 받았다. 특히 톱 시드를 받은 루블레프를 조별리그와 결승전에서 두 차례 만나 모두 제압했다.

정현이 ‘교수님’이라 불리는 건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강인한 정신력은 해외 언론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부분이다. ATP는 이날 경기 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교수님’이 이제는 차세대 최고의 선수가 됐다”고 전하면서 “루블레프는 투어 우승 경험이 있고 정현은 결승 진출도 처음이다. 정현은 피에라 밀라노 코트를 가득 메운 중압감에서도 오히려 상대보다 침착했다”고 평했다. 로이터 통신은 냉정함을 잃지 않는 정현을 ‘아이스맨’이라고 칭했고, AFP통신은 “정현이 세계적인 테니스 코치 닉 볼레티에리에게 압박감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력을 배웠다”고 분석했다.

정현의 정신력은 이날 더욱 빛났다. 경기 초반 루블레프의 기세에 눌려 1세트를 내줬다. 하지만 2세트에선 루블레프의 서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블레프는 샷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라켓을 바닥에 내팽개치기도 했다. 반면 정현은 침착했다. 장기인 백핸드 다운더라인을 활용해 차분히 포인트를 쌓아갔다. 그는 35번의 서비스 브레이크 위기를 27번 극복(77%)해내며 이 부문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대회 기간 내내 굳건한 멘탈을 유지했다. 루블레프는 이날 경기 후 “경기 초반에는 내가 정현보다 월등히 잘했지만, 경기 도중 감정이 흔들렸다. 정현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했다”며 정신력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했다.

한국 테니스의 새 역사를 쓴 정현은 이날 경기 후 “우승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매우 기쁘다. 시즌을 이렇게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감격해 했다. 그러면서 “1세트를 지고 2세트 첫 게임도 브레이크 당해, 긴장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다. 만약에 2세트에도 졌다면 매우 화가 났을 테지만 마음속으로는 내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시즌 최고의 마무리를 한 정현은 올해를 끝으로 ‘넥스트 제너레이션’(21세 이하 상위 200위)을 졸업한다. 다음 과제는 한국 역대 최고 랭킹 경신이다. 한국 남자 선수 최고 기록은 2007년 8월 이형택이 세운 36위다. 메이저 대회 16강에 두 차례나 오르며 한국 테니스의 대들보로 자리잡은 이형택 ‘이형택재단’ 이사장은 이날 “내 기록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일본의 니시코리도 넘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어 “부단한 노력으로 단점을 보완하는 정현의 자세를 예전부터 높이 평가했고, 앞으로 어려움이 닥쳐도 슬기롭게 극복해낼 것”이라며 치켜세웠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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