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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의 어머니

입력
2017.11.12 15: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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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때문에 목이 너무 아프다 ㅠㅠ

그가 보낸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늘 그는 와이셔츠를 입었고 넥타이를 맸다. 입사 시험 면접을 보러 갔다. 그 동안 자기 소개서를 쓰고, 이런저런 시험 점수를 기록하고, 무미건조한 정보들을 부풀려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썼으나, 그의 가치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 다음 단계인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은 자신의 능력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 앞에 직접 서게 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그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때가 기억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를 쫓아다니며 집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대던 그가 막상 밖으로 나가는 관문인 현관에서 서면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신발을 안 신으면 못 나간다고, 아직 혈기왕성한 엄마였던 내가 을러대면,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밖에 나가 놀고 싶은 마음과 신발을 신기 싫은 마음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신발을 신으면 발이 불편한 것일까,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귀찮은 절차를 자꾸 요구하는 게 싫은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따금 가엾고 안타까워 공원 잔디밭 같은 곳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것을 모르는 척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차 신발에 익숙해진 그는 한 동안 현관 앞에서 떼를 쓰거나 울음을 터뜨리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그와 나는 현관에서 또 한 번 실랑이를 하게 된다. 늘 그렇듯 그날도 그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래서 귀찮아하는 나를 오래 졸랐다. 시큰둥했던 엄마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지 현관에 서자 그는 왼쪽 신발과 오른쪽 신발을 다르게 신고 나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왼쪽은 파란 신발, 오른쪽은 노란 신발’이라는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왜 안 되느냐고 물었다. 할 말이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군색해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충 말했다.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웃을 거라고. 바보라고 놀릴 거라고. 그러자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는 농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선언한다(‘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능이 발달하면서 인류가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여 양을 길들이고 밀을 재배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렵채집인의 궁핍하고 가혹한 삶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농부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통념은 오해라는 것. 농업혁명 덕분에 식량의 총생산량은 늘어났지만, 인구폭발과 지배엘리트 계급을 낳았다. 덕분에 농부들은 수렵채취인보다 더 열심히,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에서 일해야 했고, 영양소가 결핍된 단조로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DNA 복사본이 세상에 퍼져나갔는가를 따지는 진화의 기준에 의하면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은 밀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밀이 농부를 길들였다고 할 수 있다고 책의 저자는 설명한다.

단추 때문에 목이 너무 아프다 ㅠㅠ

그가 보낸 문자를 다시 들여다본다.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쓴다. 단추랑 넥타이 풀고 들어가. 옷은 크게 상관없을 거야. 슬며시 불안이 엄습하여 쓰던 글씨를 지운다. 밥을 벌고, 비바람과 햇빛을 가릴 지붕을 얻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려면,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바보라고 놀림 받지 않으려면, 아득한 과거의 농업혁명에서부터 시작된 이 거대하고 복잡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체제 속으로 진입하려면... 나는 다시 자판을 두드린다. 조금만 참아. 전송 버튼을 누르며 생각한다. 농업혁명 이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은 ‘그/그녀의 어머니’들이 벌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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