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서서 연체를 부추기는 정책이다.” “이자 잘 내는 사람만 오히려 손해를 본다.”
정부가 조만간 내놓을 빚 탕감 정책이나 연체자 지원 방안을 다룬 기사를 보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댓글이 적지 않습니다. 갚아야 할 빚을 완전히 탕감해주거나 연체자가 갚아야 할 연체이자를 아예 부과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취지라고 해도 정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빚을 꼬박꼬박 갚아 온 사람으로선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 밖에 없고, 무엇보다 ‘빚은 갚아야 한다’는 원칙과도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새 정부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책의 이면을 살펴보면 무조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정책이라고 몰아붙이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정부가 혈세를 투입해 장기연체자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달 중 빚 탕감 정책을 발표합니다. 다음달엔 연체자 지원 방안을 내놓습니다. 모두 정책 취지로만 보면 나무랄 데 없지만 갚아야 할 빚이나 이자를 탕감해준다는 점에서 포퓰리즘 정책이란 비판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빚 탕감 정책에 혈세 투입 안 된다
정부가 밝힌 빚 탕감 대상은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280만개에 달하는 연체채권 중 원금이 1,000만원 아래인 빚을 10년 이상 갚지 못한 연체자(40만3,000명)입니다. 아직 소멸시효가 남아 있어 법적으론 추심이 가능하지만, 10년 넘게 빚을 갚지 못할 정도면 사실상 극빈층에 해당하는 만큼 이참에 아예 빚을 없애주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행복기금은 막대한 손해를 보는 건 아닌지, 이 과정에서 정부 혈세가 투입되진 않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답부터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국민행복기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탄생한 기금입니다. 후보자 시절 빚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돕겠다며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설치해 322만명의 채무불이행자의 빚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공약한 데 따른 거죠. 하지만 실제론 기금의 사업 규모는 1조5,0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여기에 정부 재정은 한 푼도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저신용자의 빚을 탕감해주겠다며 만든 신용회복기금이 그대로 국민행복기금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명패’만 바꾼 셈이죠. 신용회복기금 역시 은행들의 출연금으로 조성된 기금이라 정부 재정은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간 정부가 ‘저신용자 빚 탕감’ 사업에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은행들이 기부한 돈으로 생색만 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행복기금은 추심기관? 추심 수익률 50%
행복기금도 거의 손해를 안 봅니다. 행복기금은 은행, 대부업체 등 금융사로부터 연체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채무조정을 해줬습니다. 채무자 입장에선 금융사에 진 빚이 행복기금으로 넘어간 셈이죠. 채무자가 행복기금에 채무조정을 신청하면 원금의 50%가량을 깎아주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나눠 갚도록 해줬습니다. 행복기금은 금융사들이 헐값에 연체채권을 팔도록 유인하기 위해 추후 추심 이익이 발생하면 이를 배분해주기로 했습니다. 금융사로서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 거죠. 어차피 회수가 어려운 연체채권을 기금에 넘기고 추후엔 추가 수익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국민행복기금에 따르면 지난 2013년 5월부터 올해 7월까지 행복기금이 연체자 250여만명에게 회수한 대출 연체금은 1조3,197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16조4,350억원 어치의 연체채권을 원금의 5.2%인 8,803억원에 사들인 걸 감안하면 매입원가보다 4,394억원을 추가로 회수한 셈입니다. 수익률로 따지면 무려 50%에 달하죠. 때문에 그간 행복기금이 채권추심에 더 매달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그간 행복기금에서 채무조정을 받은 사람은 전체 대상자 280만명 중 20%인 58만2,000명에 불과합니다.
결국 이번에 정부가 빚 원금이 1,000만원 아래인 채무자의 빚을 완전 탕감해준다고 했지만 실제 채권값은 1,000만원에 훨씬 못 미쳐 기금이 액면가 그대로 손해를 보는 구조는 아닌 겁니다. 또 정부는 40만명을 모두 수혜 대상자로 삼는 게 아니라 까다로운 소득심사를 거쳐 사실상 극빈층만 수혜자로 가려내기로 했습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무분별한 빚 탕감 정책이라 여기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파격 내세운 이전 정부 정책 모두 ‘용두사미’
그렇다고 해도 빚을 완전 탕감해주겠다는 새 정부 정책은 그간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특히 정부의 이번 대책은 8ㆍ15 광복절 특별사면처럼 ‘일회성’ 대책이란 점이 문제로 꼽힙니다. 이 경우 탕감 기준을 두고 형평성 논란이 거세게 일 수 있습니다. 형편은 안 좋은데 연체기간이 10년에 못 미쳐 탕감 대상에서 빠지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후보 시절 파격적인 저신용 구제 공약을 내놨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720만명 신용대사면 공약을 내놨고, 박 전 대통령은 320만명의 채무불이행자 빚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죠. 하지만 모두 생색내기 수준에 그쳤습니다. 의욕을 앞세워 추진은 했지만 모두 ‘도덕적 해이’ 논란에 공약이 한참 후퇴했기 때문입니다. 새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성공도 사실 이런 논란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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