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기에 서둘러 텃밭의 무를 뽑았다. 무를 다듬어 바람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로 포장해 창고에 집어넣은 뒤 오후에는 무청을 엮어 뒤란 처마 밑에 가지런히 매달았다. 저물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돌담 옆의 감나무, 가죽나무의 붉게 물든 이파리들이 우수수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도 그렇지만, 나무들도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몸짓이리라.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만추의 낙엽을 보며 삶의 종말을 뜻하는 상징으로 치부했다. 그걸 거울삼아 존재의 쇠락과 늙음만을 반추했지, 존재의 성숙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겉모습은 늙어 가도 번뜩이는 지혜와 슬기로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갖춘 잘 여물어 가는 인생도 있다. 내면의 뜰을 알뜰살뜰 가꾼 이들이다. 풋풋하던 잎사귀가 진액을 잃고 떨어지면 곧 알몸이 드러나지만 누가 그 당당한 알몸을 깔볼 수 있겠는가. 깔보기는커녕 부끄러움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어느 날 늘그막의 붓다가 아난다와 함께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마른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길 위에는 낙엽이 쌓여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그때 아난다가 스승에게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까? 아니면 무언가 우리에게 숨기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아난다야, 네가 보다시피 나의 손은 이렇게 펼쳐져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이 숲을 보아라.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이 숲처럼 열려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이 없는 법이다.” 그러고 나서 붓다는 낙엽 몇 잎을 집어 손안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말했다. “지금 나의 주먹은 닫혀 있다. 너는 그 낙엽을 볼 수 없다.” 다시 붓다는 주먹 쥔 손을 활짝 폈다. 낙엽들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흩날렸다. 붓다가 말했다. “깨달은 자의 손은 주먹과 같지 않다. 그는 열려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드러내었다. 만일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너 자신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다.”
이처럼 잘 여문 인생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통나무처럼 소박 단순하기 때문이다. 알몸의 귀향을 항상 의식하고 살기 때문에 그 알몸에 거짓의 옷을 두르지 않는다. 보화가 안에 그득하여 광채를 뿜는데 무엇 때문에 겉을 꾸미겠는가. 곱게 물든 아름다운 낙엽의 빛깔이 나무 내부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듯, 아름답게 여문 인생은 그 내면을 잘 가꾸었기 때문에 따로 장식이 필요치 않다. 인도의 고산지대에서 척박한 삶을 꾸려 온 라다크인들의 다음과 같은 짧은 경구는 누구나 가슴에 새겨 두고 자주 곱씹어도 좋으리라. “호랑이의 줄무늬는 바깥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죽음이 임박한 중에도 큰 선물을 안겨주고 떠나가신 스승 한 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원주의 예수로 불렸던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 그분은 인간의 줄무늬가 안에 있음을 당신 몸으로 증언하신 분이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분이 입원하고 있는 암병동을 찾아갔을 때, 몸은 바짝 마르셨지만 맑은 눈빛은 여전하셨다. 인사를 올리자 그분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씀하셨다. “지금 괜한 짓들을 하는구먼! 암(癌)도 내 몸인데 잘 모시고 가야지.” 깊이 여물지 않은 인생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다.
바람결에 낙엽을 흩날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지극한 몸짓으로 알몸의 귀향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살아생전 선생의 얼굴이 겹쳐졌다. 문득 내 안에 큰 천둥소리가 들렸다. 늙지만 말고 잘 여물어 가시게! 나는 오늘의 큰 스승인 나무들에게 경배를 바치고 싶어졌다.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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