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과 장미대선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대선 유세때부터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친 여성’정책을 내세웠다. 문 대통령은 선거 유세 기간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고 여성단체협의회의 성평등정책 간담회에도 참석했다. 정권 출범 이후에도 공약이었던 여성 각료 비중 30%를 달성했고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도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계에서는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바로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의 탁현민 선임행정관이다. 그가 여러 저서에서 보여준 지극히 여성비하적인 생각은 여성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라는 책에 “고교 1학년 때 (나보다) 한 살 어린 16세 여학생과 첫 성관계를 가졌다…(여학생을) 친구들과 공유했다”는 내용을 썼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되자 그는 뒤늦게 ‘소설’이라고 해명했다.
여성계에서는 거세게 반발하며 탁 행정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8월 22일 “대통령 인사권이 존중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탁 행정관에 대한 논란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는 ‘그 정치가 놓친 것들: We Can Speak -탁현민 사건의 현재진행형에 대한 여성운동 집담회’를 공동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여성계와 청와대의 탁 행정관을 둘러싼 갈등을 짚어보고 탁 행정관의 여성신문 고소사건을 짚어보는 자리였다.
“탁 행정관의 잔류, ‘여성내각 30%’ 퇴색시켜”
발제자로 나선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아직까지 청와대에 남아있는 탁 행정관이 여성 내각 30%라는 (정부의) 상징적 대표성을 퇴색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지지자들은 탁 행정관 임용에 대한 비판과 경질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문재인 정부 흔들기’라고 압박했다”며 “탁 행정관 경질을 주장한 여당 소속 여성 의원들과 여성가족부 장관은 월권 행위라며 청와대 안팎의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정현백 여성가족부장관의 탁 행정관 경질 요청에 청와대가 답을 하지 않아 정장관의 위상이 축소되고 여가부가 다른 여성단체들과 공조할 수 있는 기반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탁 행정관의 성차별적 콘텐츠가 입힌 사회적 손해 계산해야”
탁 행정관은 여성신문이 지난 7월 25일 게재한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기고문이 허위사실을 담고 있어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며 3,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문제의 글은 탁 행정관의 책에 나온 내용과 비슷한 일을 겪은 여성이 체험담을 기고하며 비유적으로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여성계에서는 여성폭력을 다룬 탁 행정관의 책 때문에 발생한 사회적 손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탁 행정관은 여성신문 기고문 때문에 마치 강간범처럼 보인다며 소송을 제기했다”며 “이는 여성대상의 폭력을 사회적 범죄로 규정하라고 요구해 온 여성운동가와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탁 행정관의 책에 드러난 것처럼 일부 남학생들이 소수의 여학생을 공유하고, 이를 여학생이 ‘쿨하게’ 들어주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냐”며 “지금도 실재하는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들은 이를 힘들게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 탁 행정관이 정부에 전가하는 부담과 앞으로 정부 및 여성단체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활발한 의견이 오갔다. 여성학자인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탁 행정관의 책을 읽다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도태되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하게 된다”며 “그가 청와대까지 진출한 것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존재가 아닌 공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민주당 전체의 보수화를 불러왔다”며 “현재 문재인 정부가 섹슈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기획, 성소수자에 대한 전향적인 기획 등을 뒤로 하고 아름다운 대통령 부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탁 행정관을 안고 가면서 비롯됐다”고 덧붙였다.
반면 탁현민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태희 한국여성정치연맹 이사는 “탁현민 사건 이후 청와대가 인사검증에서 더 조심스럽고 세심해졌다”고 말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정부에서 여성 관련 정책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전화가 자주 온다”며 “지난 9년간 없던 일이라 놀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정과제에 여성단체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도 많아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하다”며 “기묘한 형태의 거버넌스가 시작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4년여를 보낼 수 있을지 고민도 깊다”고 강조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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