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 주자 전을복 할아버지
손녀와 함께 원주 시내 질주 예정
매일 5㎞씩 뛰며 기초체력 다져
일반인이 2개 대회 참여 드물어
“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기회라 간절함은 더했다. 손녀와 함께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나서겠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보다 못한 손녀는 도우미로 나섰고 할아버지의 꿈은 현실이 됐다.
“올림픽에서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성화봉송 주자로 우리나라를 대표해 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죠. 또 이번 대회에선 손녀와 함께 하니 든든하기도 하고 더 보람이 있을 것 같아요. 벌써부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렙니다.”
7일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만난 전을복(83) 할아버지가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에 이어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에 선정된 소감에는 떨림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도 아닌 일반인이 올림픽 2개 대회의 성화봉송 주자로 참가한 사례는 국내외에서도 드물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인 그는 내년 2월 2일 보조주자인 손녀와 함께 원주시청 인근 200m 구간을 달릴 예정이다. 손녀는 성화봉송 주자로 나설 방법 찾기에 노심초사했던 그를 대신해 이번 대회 성화봉송 파트너사인 KT에 인터넷 신청서를 제출해 할아버지가 꿈을 이루는 걸 도왔다. “할애비가 걱정하는 게 안쓰러웠나 봅니다. 손녀가 적극적으로 나서 줬어요.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그는 손녀의 효성이 지극하단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성화봉송과 인연은 체육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무관치 않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입대한 군부대에서 쌓은 태권도 실력을 바탕으로 1960~80년대 미군 부대에서 태권도 사범(1972년 공인 6단 획득)으로 일했다.
20년 넘게 태권도를 한 덕분에 그는 고향 인근에선 꽤 알아 주는 유명인사로 통했다. “운동을 한 덕택으로 인심도 많이 얻었어요. 이웃집에 들어온 도둑들도 몇 번 잡아주고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서 목숨도 살려줬더니 그렇게 됐네요.” 지역 주민들의 호응과 함께 원주육상연합회 회장에 추대된 그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발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하지만 체육인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태권도 체육관을 열긴 했지만 3남매와 함께 생계를 꾸려가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운동 밖에 몰랐던 남편을 위해 말없이 통닭집을 20년 넘게 운영해 온 아내가 있었기에 생계가 이어졌다.
검은 유혹도 따라왔다. 젊었을 때만 해도 운동을 좀 했다는 이유로 “우리와 같이 행동하자’며 회유하던 불량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치 깡패들까지 접근을 해왔습니다. 만약 그때 회유를 당했다면 올림픽 성화도 못 들었겠죠.” 그는 젊은 시절, 나락으로 떨어질 뻔 했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쉽지 않은 길을 달려왔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레이스를 소중하게 남기기 위해 현재 매일 5㎞ 거리를 달리면서 기초 체력 다지기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우리 같은 실버세대에도 새로운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그에게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미 시작됐다.
원주=글·사진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그림 5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된 전을복(83)씨가 강원도 원주 자택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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