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암매장’ 발굴 현장 공개
시종 숙연하고 무거운 분위기
호미 등으로 문화재 발굴하듯
바둑판식 4곳 구획 수작업
땅속 50㎝서 가스배관 등 5개 발견
“그간 수 차례 지반공사 이뤄져
실제 유해 나올까” 의구심도 나와
그 누군가가 묻었고, 또 그 누군가는 묻혔을 거라는 그 곳은 숙연했다.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희생자들을 암매장한 장소로 알려진 옛 광주교도소. 거기서도 북측 담장에서 바깥쪽으로 3m 떨어진 ‘의혹의 땅’엔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라도 찾겠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간절함이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6일 오후 공개된 5ㆍ18 암매장 추정지는 37년간 켜켜이 쌓였던 세월의 더께가 한 꺼풀씩 걷히고 있었다. 1980년 5월 “여기에 묻었다”는 가해자들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한 현장 발굴 작업이 조심스레 시작된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하고 사라졌던 이들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는 개토제가 열린 지 이틀 만이다. 김후식 5ㆍ18부상자회장은 “역사적인 일이기에 가슴이 벅차면서도 조마조마하다”고 애써 말을 아꼈다.
이날 교도소 담장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117m 폭 3~5m의 발굴 현장은 전체 구간 중 4곳이 바둑판 모양(가로 10m 세로 3m)으로 각각 구획된 뒤 25~50㎝ 깊이로 파헤쳐져 있었다. 발굴 작업에 나선 대한문화재연구원 측이 문화재를 발굴하듯 호미와 모종삽, 쓰레받기 등으로 지표면에서부터 조금씩 흙을 걷어낸 것이다. 80년 5월 당시 희생자 암매장에 대한 가해자와 목격자의 기억이 공존하는 이 곳에선, 최소한 그들(계엄사령부)의 기록만으로도 민간인 27명(보안사 28명)이 사망했고, 이 중 11구의 시신만이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됐다.
그러나 ‘그 날’에 대한 기억에 근거한 발굴작업은 예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가스배관과 통신회선관 등 5개 배관이 발견돼 한때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중 가스배관은 1999년 매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원 측은 80년 5ㆍ18 이후 최소 3~5차례 걸쳐 각종 지반공사가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그간 수 차례 땅이 파헤쳐지는 공사가 이뤄졌다면 실제 유해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5ㆍ18기념재단 측이 “이번 발굴 작업의 가장 큰 과제는 (시신을 묻은) 구덩이를 찾는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해는 없더라도, 암매장한 흔적이라도 찾겠다는 것이다. 5ㆍ18 당시 계엄군이 희생자를 암매장한 뒤 다시 파갔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은 터였다.
연구원은 발굴 현장을 1m50㎝ 가량 깊이로 파헤칠 계획이다. “가마니로 2구씩의 시체를 덮어 가매장했다”, “땅을 1m~1m50㎝ 깊이로 파서 묻었다”는 5ㆍ18 당시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지휘관 등의 검찰 진술과 제보를 토대로 한 것이다.
연구원 측은 암매장 구덩이 흔적을 흙 색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땅을 파내고 다시 흙을 메울 곳은 황갈색을 띄는 기반토와 달리 검정색에 가깝기 때문이다. 재단과 연구원은 이러한 지질분석을 통해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지 않더라도 계엄군이 훗날을 대비해 희생자 시신을 묻었다가 다시 파냈는지 추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양래 5ㆍ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지금 발굴이 이뤄지는 곳과 다른 장소에도 암매장했다는 제보가 있다”며 “정밀조사를 통해 추가발굴 지역을 특정해 옛 교도소에서 5ㆍ18 행방불명자 소재 확인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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