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방문 중 “이란 통제에 고통”
암살 음모 구체적으로 털어놓아
이란 “트럼프ㆍ사우디의 계획” 반박
사드 알하리리(47) 레바논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이란의 위협과 암살 공포로 더 이상 국정을 수행할 수 없다면서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임을 발표했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갈등이 중동 정세를 다시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리리 총리는 4일(현지시간) 사우디 방문 중 아랍권 TV로 방송된 연설을 통해 총리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는 암살 위협을 거론하면서 시아파 맹주 이란 및 이란과 동맹 관계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는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의 정치적 통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며 “나는 국민을 실망시키기를 원치 않고 내 원칙에서 후퇴하고 싶지도 않아 사퇴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란이 중동에 퍼뜨린 악은 역풍을 맞을 것” “이 지역에서 이란의 손이 잘릴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하리리 총리는 헤즈볼라가 레바논과 시리아 국민을 상대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헤즈볼라는 시리아 사태에 개입해 이란이 후원하는 시리아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암살 음모도 구체적으로 털어놨다. 하리리 총리는 “아버지 암살 작전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팽배하다. 내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진행되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라피크 알하리리는 레바논 총리로 10년간 두 차례 재임한 뒤 2005년 2월 헤즈볼라 추종 세력의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 사우디 정부 관계자는 “하리리 경호원들이 암살 모의에 관한 확인된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했다.
사우디 태생으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하리리 총리는 부친 암살 후 집안의 강권에 못 이겨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수니파 정치블록을 이끌며 2005년과 2009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이란을 등에 업은 헤즈볼라와는 연정 구성 때를 제외하고 줄곧 대립했다. 지난해에는 헤즈볼라와 손잡은 미셸 아운 현 대통령을 지지해 겨우 내각을 꾸리고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최근 시리아 사태로 영향력이 커진 헤즈볼라의 압박이 심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하리리의 주장을 일축하며 미국과 사우디에 역공을 폈다. 이란 외교부는 “하리리 총리 사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의 깜짝 사임 발표로 레바논은 물론 중동지역이 종파갈등의 격랑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각각 수니파 사우디와 시아파 이란이 뒤에 있는 하리리 정부와 헤즈볼라 사이의 불안정한 동거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며 중동의 긴장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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