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생 밀착형 의정 활동해도
당에 밉보이면 공천받기 어려워
국회의원 여성비율 17% 그쳐
개헌 등 빅이슈 앞에 존재감 미미
#2
득표에 정당 조직력 필요한 현실
계파 등 기성정치 거부 어려워
여성 대변 대신 기존 세력 편입
지역인재 일찌감치 출마 포기도
서정순(49) 전 서울 서대문구 구의원은 2006년부터 두 차례 구의원을 지낸 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시의원에 도전하려다 꿈을 접었다. “구의원으로서 역할은 누구보다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치’를 잘 못했던 것 같아요.”
2003년 대학원을 다니다 네 살 아들을 돌보느라 공부를 잠시 접었던 그는 동네 어린이집 비리 문제가 불거져 주위 엄마들과 함께 풀뿌리 보육운동을 시작했다. 아들이 다니던 어린이집에 운영위원회를 만든 뒤 ‘서대문구 구립 어린이집 운영위원회 연합회’를 결성해 공동 대표를 맡았다. 엄마들끼리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내고 구의원, 구청장을 줄기차게 찾아갔다. 결국 구청장은 유명무실했던 보육정책위원회에 엄마들의 목소리를 반영토록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씨는 구의원에 출마했다. 후보 출마를 위해 최소 100명의 당원이 추천을 해야 한다고 하자, 함께 활동한 엄마들이 너나없이 당원 가입을 하고 서씨를 추천했다.
제도권 정치에 진출한 서씨는 신나게 일했다. 제보도 쏟아졌다. 그는 구립 어린이집 대상 친환경급식 개선, 교사들의 장기근속수당 초과근무수당 등 근무여건 개선, 전국 최초 행정업무를 전담할 비담임 주임교사 신설 등을 실시했다. 다른 지역 어린이집에 비슷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서대문구는 좋은 사례로 꼽혔고, 서씨에게는 도와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시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기 위한 정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지역구 국회의원 행사에 소홀했다는 게 공천 탈락에 대한 자평이었다. “구의원이면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진행하는 각종 지역 행사에도 열심히 따라 다니고 사무실 관계자들 식사도 챙겨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그 시간이면 현장 한 번 더 가보고 정책하나 법안 하나 더 만드는데 써도 모자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정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나는 내 일만 열심히 하자고 마음 먹었죠. 물론 그 결과 공천 탈락이었죠.”
“정책 실적 냈지만 공천은 못 받아”
기성 정치권에도 ‘생활 정치’라는 구호가, 자녀를 둔 여성 정치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 정치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기성 정치의 타성을 벗어나 엄마들이 관심 갖는 정책은 주요 이슈에서 후순위로 밀렸고, 엄마 정치인들은 당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정치 관행을 답습하곤 했다.
한 정당의 여성 보좌관 A씨는 “엄마 의원, 엄마 보좌진이 보육, 환경, 먹거리, 안전 문제를 당의 중심 이슈로 삼자고 요구해도 늘 정계 개편, 개헌 등 정치 이슈에 밀려 곁다리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며 “여성 의원들이 처음에는 생활 밀착형 정책 이슈를 열심히 만들어 보겠다고 각오를 다지다가도 계파 정치, 편 가르기 정치 분위기에 젖어 어느 새 기존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은 절대적 남초의 국회 환경이 한 원인으로 꼽힌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6대 5.9%에서 20대 17%로 꾸준히 증가했지만 인구 구성 반영에는 태부족이고, 유엔이 권고하는 여성의원 비율 30%에도 못 미친다.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은 한 명도 없고, 기초자치단체장은 9명(4%)에 불과하다. 보좌진의 남초 현상은 더 심각해 4급 보좌관 590명 중 여성은 6%(37명, 7월 기준)에 불과하다. 50대 남성 중심의 주류 정치인들은 엄마 유권자들이 중시하는 이슈에 대해 민감도가 떨어져 여성 의원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간과하기 십상이다.
서씨처럼 기성 정치 관행을 거부했다간 공천에서 밀려나는 현실에서, 여성 정치인은 여성 세력화와 제 목소리를 추구하기보다 기존 세력에 편입함으로써 정치 생명을 이어간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여성 의원 수가 늘고는 있지만 당내 입지가 약하고 그것이 세력화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17~19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을 경험한 여성 의원은 11명이고 이중 여성위원회(6명)를 빼면 5명뿐”이라며 “여성 의원들도 그저 다음 공천을 보장받기 위해 당이 어려울 때 얼굴마담 역할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생활정치 꿈꾸다가 정치와 멀어지다
‘누구 편이냐’를 가르는 진영 논리, 계파 정치의 강고한 관행은 ‘엄마 정치’의 혁신을 가로막는 원인이자 결과다. 경기 수원의 주부 조안나(48)씨는 2014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한 정당의 시의원으로부터 출마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10여 년 전부터 아파트 단지 엄마들과 공동 육아, 마을 꽃밭 가꾸기, 자원봉사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일 잘하는 엄마라는 소문이 꽤 난 조씨는 수원시 좋은시정위원회 교육자치위원으로도 맹활약했다. “같이 활동했던 엄마들과 오랫동안 상의를 했죠.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찬성하는 엄마들은 엄마들 힘으론 안 되는 한계를 법과 제도로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알지도 못한 채 나섰다간 잃는 게 더 크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맞섰다.
조씨는 결국 출마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정당을 택해서 출마를 하면 다른 쪽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는 걱정이 많았죠. 사람들은 계속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데 (정치에) 휘말리는 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 싸움에 오히려 그간 해왔던 지역 활동이 위축되거나 훼손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조씨는 이미 편가르기에 시달려 좌절한 적이 있다. 2013년 일부 주민들이 조씨 등을 향해 당시 야당(더불어민주당) 출신 시장의 사조직이라고 음해했고, 마을 주민들의 오해를 푸는데 몇 달이 걸렸다. 도리어 2014년 당시 여당 의원이었던 남경필 경기지사가 조씨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파트 1층의 뚫려 있는 공간을 5분의 2까지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는데도 억측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조씨는 일단 ‘누구 편’을 낙인찍고 시작하는 정치 환경에서 제대로 포부를 펼칠 자신이 없었던 셈이다.
‘엄마 정치’ 마음껏 날갯짓 언제쯤
생활 정치에 대한 공감과 유권자의 표를 얻는 능력이 꼭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배주임(47) 정의당 경남도당 여성위원장은 올해 초 생애 첫 당원 가입을 한 ‘새내기 정치인’이다. 4월 12일 경남 김해시 시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2위로 낙선했다. 10년 전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 주부로 아파트 단지 내 엄마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작은도서관’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김해시작은도서관협의회회장 등을 맡아 김해가 전국적으로 작은도서관 사업 잘 하는 도시로 알려지는데 앞장서 왔던 그였지만 정치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무보수로 10년 동안 작은도서관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추진력을 인정받았지만 거대 정당의 조직력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배씨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 번 시의원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3 수험생 엄마로서 넘어야 할 산이 쌓여 있다. “경쟁 후보들은 벌써 지역 관리를 위해 행사를 찾아 다니고 있는데 저는 올해는 포기했습니다. 빨리 기존 정치 질서에 적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버겁기만 하네요. 엄마들이 고민과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쳐 볼 수 있는 정치 환경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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