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 시절 과거 정권에서 저질러진 대형비리 사건이 여럿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그 가운데 ‘안풍(安風)’ 사건은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15대 총선 때 안기부(국정원 전신) 계좌에서 인출된 1,000억원대의 거금이 현 자유한국당 뿌리인 신한국당의 선거자금으로 불법 지원된 사건이다. 이 돈 출처가 YS(김영삼 전 대통령) 대선잔금 등의 비자금인지, 안기부 예산인지를 놓고 1, 2심 판결이 갈렸지만 대법원은 YS 비자금으로 최종 결론지었다.
▦ 이 사건은 정권과 국가최고정보기관의 검은돈 거래에 대한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중앙정보부시절부터 거액의 자금이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나 비자금으로 청와대에 제공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이런 파문을 의식해 김대중 청와대는 국정원 예산에서 나오는 통치자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에 따라 수백억 원이 국고로 반납됐다. 견해가 엇갈리긴 하지만 노무현 정부시절에도 적어도 상시적으로는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청와대에 통치자금 명목으로 상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하지만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청와대로 흘러 들어갔다는 주장과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춰 국정원 특수활동비 일부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했던 과거의 관행이 부활했을 개연성이 높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청와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엊그제 검찰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문고리 3인방’과 정무수석 등이 국정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특수활동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 액수는 월 5,000만원에서 1억원 규모다. 조윤선, 현기환 전 정무수석들은 월 500만원씩 국정원 돈을 받았다고 한다. 문고리 3인방 중 한 사람인 이재만 전 청와대총무비서관은 검찰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 지시로 매달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받았고, 금고에 넣어 관리했다”고 진술했다. 규모는 줄었다고 해도 목적에 맞게 써야 할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쌈짓돈으로 여기고 사용했다는 뜻이다. 신라시대 선덕여왕 이후 1,400년 만에 가장 위대한 여성지도자(박 전 대통령의 동생 근령씨 표현)라는 평가 치고는 참으로 한심하고, 물색 없는 행태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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