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서점까지 도보로 15분, 대형 병원까지 차로 5분, 문만 나서면 버스와 지하철이 널려 있고 지하엔 시장, 몇 층위에 극장, 건물 중앙엔 광장까지 있는 낙원 같은 주거공간이 서울에 과연 존재할까? 존재한다. 모두가 아는 서울시 종로구의 낙원상가가 그 주인공이다.
건축가 황두진의 신간 ‘가장 도시적인 삶’은 낙원상가를 비롯한 상가 아파트 탐방기다. 국내 건물 25채, 해외 건물 5채를 방문했다. 왜 상가 아파트인가. 31일 만난 황 소장은 1960년대 말~70년대 초 잠깐 유행했다 사라진 상가 아파트를 “백악기에 멸종한 공룡”에 비유했다.
“도시를 구성하는 키워드는 밀도와 복합입니다. 한국은 인구의 92%가 도시에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밀도와 복합을 경험한 역사가 길지 않아요. 그래서 늘 도시 탈출을 꿈꾸며 전원 속 단독주택을 주거의 이상향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시에 사는 한 이상적인 도시 주거를 논의해야 해요.”
그가 상가 아파트를 도시 주거의 해법으로 지목한 이유는 토지 이용률이 높고, 저층에 상가가 있어 거리의 활력을 유지하며, 상주인구와 유동인구의 적절한 균형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적인 건물이 이미 한국 건축사에 버젓이, 그것도 많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제 생각엔 상가 아파트가 너무 시대를 앞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복합 건물을 능숙하게 다루기 힘들었고, 거주자들이 불편을 호소하면서 상가 아파트는 마치 실패한 건물처럼 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의 기술력이면 충분히 쾌적한 상가 아파트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오래된 상가 아파트들은 지혜로운 노인처럼 21세기 건물들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서소문아파트에선 주변 상가의 연속성을 깨지 않으려는 배려를, 안산맨숀에선 아파트에서 옥상 텃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일아파트에선 시장과 아파트가 한 몸을 이루는 방법을 배운다. “요즘 건물들은 자기가 면한 도로에 뭘 해줄까를 고심하지 않아요. 건물이 도시 안에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첫째 길을 향해 열려야 하고 둘째 시각적으로 근사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최대한 오래 살아야죠.”
책에 실린 사진은 황 소장이 직접 찍었다. 모든 건물은 정면에서, 정면 각도가 안 나오면 포토샵으로 붙여 기어이 정면을 만들었다. “사람의 초상화처럼 보이고 싶어서”다. “수십 년 된 건물들이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저보다 나이가 어려요. 그런데 건물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너 어쩌다 그렇게 늙었냐’란 탄식이 절로 나오더군요. 동안으로 유명한 나라가 왜 건물들은 무심하게 방치하는지… 그 처연함을 사진에 담고 싶었습니다.”
책에는 상가아파트 답사 코스와 가이드가 부록으로 딸려 있다. 각 건물이 누렸던 전성기, 그들로 인해 한때나마 활기 넘쳤던 도시의 흔적을 따라가볼 수 있다. “중구와 종로구 인구를 합쳐도 30만 명이 안 되는 걸 아세요? 도시 회귀는 필연이고 따라서 지금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단독주택은 주거의 미래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돼요. 도시에서의 편리한 삶이 뭔지 국가 차원에서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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