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372쪽ㆍ1만3,000원
해가 걸린 해안선, 폭풍우가 지난 후의 바다, 난파선 잔해에 달라붙은 사람들을 그린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회화 ‘아홉번째 파도’(1850)는 특유의 묘한 분위기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불린다. 파도가 넘실대지만 오직 난파선 주위만 적막한, 그래서 뒤집어진 배에 절박하게 매달린 사람들의 생사 여부를 점칠 수 없는 이 그림은 특유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꽤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2010년 작곡가 닉 디베르나르도노가 동명의 교향곡을, 나희덕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그린 동명의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림 속 절박한 이들을 2017년 한국사회에 대입해 형상화한 동명의 소설이 이번 주 출간됐다.
원자력발전소, 비정규직, 사이비종교. 우리 사회의 웬만한 갈등이 한 도시에서 폭발한다. “놀라운 디테일로 축조된”(소설가 권여선) 가상의 도시 척주에서. 해안도시 척주에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려는 계획이 추진되면서 척주는 찬성과 반대로 팽팽하게 나뉜다. 주민의 96.9%가 찬성했다는 조작 서명부까지 만들면서 핵발전소 건설을 강행하려는 시장 오병규는 한때 이 도시를 먹여 살린 기업인 동진시멘트의 사장. 동진시멘트의 젖줄 역할을 해온 석회산 35광구에서는 오래 전, 시멘트 회사 임원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고, 임원의 아내와 딸은 척주를 떠났다.
18년이 지나 딸 송인화가 척주 보건소로 발령받아 고향에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석회산이 먹여 살린 도시의 노인들은 당연하게도 분진의 각종 부작용을 달고 산다. “입에서 단내가 확 올라오게 약을 먹어야 든든”하다는 노인들에게 약 복용법을 설명하고, 마약 성분의 진통제 과다 처방을 단속하는 게 송인화의 업무다. 한데 인화가 이곳으로 온 얼마 후 한 노인이 독극물이 든 막걸리를 마시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인은 옛 임원 사망사건의 강력한 용의자. 경찰은 노인의 죽음에 송인화가 관련 있을 거라 짐작하지만 그녀는 그 시각 집주인 안금자와 함께 ‘약왕성도회’란 종교집단 신도들의 방문을 받은 알리바이가 있다.
원자력발전소 건립 반대 여론으로 시장을 끌어내리자는 주민소환 투표가 발의되고 시장은 사조직과 깡패를 동원해 투표를 방해한다. 보건소 공무원인 송인화는 주민소환 투표 발의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
이야기는 송인화와 송인화의 옛 애인 윤태진, 송인화와 사랑을 시작한 서상화 세 사람을 축으로 진행된다. 척주에서 손꼽히는 인재였던 윤태진은 고등학생 때 콜타르 웅덩이에 빠진 사고를 겪고 후유증에 시달린다. 한때 송인화와 정상적인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송인화가 무뇌아를 임신했다 자연 유산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잘나가던 야당 국회의원 비서관이었던 그는 여당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자리를 바꿔 의원의 지역구인 척주시로 내려오며 그녀와 다시 만난다.
보건소 공익근무요원인 약대 재학생 서상화는 “어떤 경계심도 없이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상냥함으로 송인화를 웃게 만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약왕성도회에 빠져 집을 나간 엄마와 동진시멘트 하청업체 직원 아버지 때문에 생긴 상처를 감추고 산다. 노조 활동을 했다가 사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아버지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약국 아르바이트 등 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
주민소환 투표를 앞두고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18년 전 사건 후 조용했던 ‘약왕성도회’는 갑자기 포교 활동을 벌여간다. 세 사람은 아이바좁스키의 그림처럼, 거센 파도 위에 서 있다.
2008년 등단해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최은미의 첫 장편소설이다. 첫 장편이란 점이 무색하게 상당한 흡입력을 갖는다. 2012년 강원도 한 도시에서 실제 일어난 시장 주민소환 투표를 모티프로 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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