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배우 고두심(66)도 자식에겐 한 없이 약한 엄마인가 보다. SBS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 딸로 출연한 후배 유선이 어느 날 “또 한번 엄마가 돼 달라”며 시나리오를 건넸다. “커다란 스크린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게 낯설고 무서워요. 그래서 영화 제안을 줄곧 거절해 왔어요. 이번에도 슬며시 미뤄두고 있었는데, 시나리오 안 읽는다고 유선에게 아주 혼났어요.” 지난달 3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고두심은 ‘그랑프리’(2010) 이후 7년 만에 ‘채비’(9일 개봉)로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 이유를 들려주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화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 애순(고두심)이 발달장애 아들 인규(김성균)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이야기를 담는다. 예상 가능한 전개이지만 고두심의 애절한 모성애 연기에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고두심은 “어떤 만남이든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라며 “헤어짐을 위한 ‘채비’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따뜻한 작품”이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인터뷰도 함께한 고두심과 김성균은 진짜 모자 사이 같았다. ‘아들 자랑’을 할 때 고두심의 표정은 특히 밝았다. “성균이가 진솔하고 담백해요. 연기 폭도 정말 넓고요. 웃을 때는 어찌나 귀여운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니까요.”
고두심은 억척스럽고 헌신적인 엄마의 대명사다. 수많은 가족드라마에서 시청자와 교감했다. “재벌집 귀부인 역할도 잘할 수 있다”고 웃은 그는 “엄마 역할엔 일가견이 있고 자신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는 버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가요계의 이미자나 조용필이라면 모를까, 배우 고두심은 아직 부족함이 많다”고도 말했다. 1972년 MBC 공채 5기 탤런트로 데뷔해 연기대상을 6번 받은, 배우 인생 45년째인 연기 장인의 겸손이다.
‘국민 엄마’의 시작은 국내 최장수 드라마인 MBC ‘전원일기’다. 양촌리 김 회장 댁 맏며느리로 22년을 살았다. “지금의 고두심을 만든 것도, 또 옥죄고 있는 것도 ‘전원일기’예요. 크나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 세월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그 사이 변곡점이 찾아온 적도 있다. 젊은 시절 ‘애마부인’과 ‘춘향전’ 주연 물망에 올랐으나, 전자는 거절했고 후자는 놓쳤다. 고두심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 얘기도 꺼냈다. 박찬욱 감독이 고두심을 모델로 시나리오를 쓴 영화다. “아유, 얘기나 하지 말지. 박 감독을 만나면 왜 나에게 출연 제안을 안 했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영화가 잘돼서 더 밉다니까요.”
‘채비’를 개봉한 이후엔 휴식기를 가질 예정이다. “드라마 2개를 마치면 1년이 휙 지나가요. 자동차 바퀴에 낙엽이 쓸리는 걸 보고서야 가을이란 걸 깨닫는 생활이었죠. 내 인생을 점검하면서 다시 뛸 채비를 하려고요. 외국에 사는 쌍둥이 손주도 보러 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고두심은 또 다른 ‘아들’ 김주혁을 떠올렸다. 인터뷰 전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주혁과 2013년 MBC ‘구암 허준’에서 모자 사이로 호흡을 맞췄다. “양친을 떠나 보낸 (김)주혁이의 옆구리가 늘 휑해 보였어요. 따뜻하게 옷을 입히고 보듬어 주고 싶었는데. 젊은 나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가다니…” 끝내 이슬이 눈가를 적셨다.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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