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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취미 발레 유행... '아재 부장'이 해봤더니

입력
2017.11.01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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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유스발레 컨서바토리'에서 김민지 강사의 지도로 발레 동작을 취해보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유스발레 컨서바토리'에서 김민지 강사의 지도로 발레 동작을 취해보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남자들에게 발레라는 단어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하다. 10대들이 즐겨 쓰는 은어 ‘빼박캔트’(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만큼 낯설다. 요즘 발레가 ‘낮은 곳’으로 임해서 동네 곳곳에 발레교습소가 생겼다고 하나 금성에서나 벌어지는 일처럼 멀고도 멀다. ‘만약에 내가 초등학교 때 야구부에 들어갔으면 이승엽 같은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공상은할지언정 ‘발레를 했다면 한국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됐을 것’이라는 가정을 남자들은 잘 하지 않는다. 화성 출신으로 금성에 불시착한 남자만이 발레리노라는 호칭을 얻을 것이라는 지독한 편견을 지닌 40대 후반 ‘아재 부장’에게 발레는 외계어나 다름없다. 그런데…

저, 저도 가능한가요?

지난 23일 외계행성 같은 곳을 찾아갔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발레교습소 ‘유스발레 컨서바토리’. 대로에서 슬쩍 벗어나 있어 도심보다는 주택가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방문 목적은 발레 해보기. 웬만한 남자라면 손사래를 쳤을 체험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요즘 발레가 생활 속 운동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데, 그게 정말 누구나 할 만한 것인지 알아보려면, 나이가 제법 들고, 연령에 비례해 배가 좀 나온 부장급 남자가 해보면 되는 것 아니냐는 부원들의 의견이 있었다. 딱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지만 평범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느낄 만한 ‘공포’가 엄습했다. 설마 레오타드(무용수가 입는, 몸에 딱 붙고 신축성이 좋은 옷)까지 입으라는 건 아니겠지? “부장, 그 모습은 저희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복장은 가벼운 운동복 수준으로 준비했다. 운동용 레깅스에 반바지와 반팔티셔츠를 챙겼다. 운동 삼아 또는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략 그런 복장이라는 정보를 수소문 끝에 얻었다. 신발은 천슈즈. 서초동 예술의전당 건너편 발레숍에서 1만2,000원에 구매하는데 점원의 동공이 조금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중년 남성의 방문이 기습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그래도 신발사이즈 265㎜를 말하자 발볼까지 챙겨 물으며 어렵지 않게 내게 맞는 천슈즈를 바로 찾아주었다. 남자고객이 적지 않다는 방증?

김민지 강사가 환영의 미소를 지었지만 발레교습소 안으로 들어서자 마음속에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옷을 갈아입고 천슈즈를 신을 때도 저항 어린 외침이 몸 안에서 메아리쳤다. 자세가 너무 우스꽝스러운 것 아닐까라는 걱정보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듯한, 불경죄를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발레 체험을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발레 체험을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그거슨 ‘아름다운 운동’이었다

먼저 기본자세 취하기. 두 발을 붙이고 발끝이 좌우양쪽으로 향해 180도를 만드는 자세부터 배웠다. 골반을 바깥쪽으로 펴고 허벅지를 편 후 무릎과 발을 펴라는 친절한 지도대로 하기에는 몸이 너무 딱딱했다. 골반은 뻐근하고 허벅지가 빳빳해지고 종아리에 경련이 스쳤다. 게으른 주인 때문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허리가 자연스레 숙여지고 어깨와 고개가 내려가는데, 김 강사는 몸을 쭉 펴라고 다그쳤다. 두 발이 양 옆으로 향하도록 하면서도 두 발을 붙여야 했다. 두 발을 180도로 펴면 발과 발 사이가 벌어지려는 힘이 강해지는데, 두 발을 붙이라니. 발꿈치도 붙이고, 무릎 관절도 붙이고, 허벅지도 붙이라니. 양 발을 붙이기 위해 엉덩이에 힘을 주어야 하는 차려 자세보다 10배 정도는 어려운 동작이었다. 발끝에서 골반까지 힘이 들어가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슬쩍 떨렸다.

두 번째 기본동작은 앞의 자세에서 옆으로 발 벌리기. 오른발을 구부리지 않고 쭉 펴서 옆으로 밀면서 발목을 구부려 세웠다가 (‘포인’ 동작) 다시 펴면서(‘플렉스’ 동작) 발을 벌리는 자세를 취했다. 앞의 첫 기본동작에서 몸이 아래로 향하게 두 발을 구부려 마름모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쁠리에’ 동작이다. 양 발꿈치가 들릴 정도로 두 발을 더 구부려 ‘데미 쁠리에’ 동작도 해보았다. 이 동작들을 할 때 몸은 지면과 최대한 직각을 유지해야 했다. 식은 땀이 등줄기로 흐르는 듯했다.

매트 위에서 누워서도 여러 동작들을 했다. “원래는 서서 해야 할 동작이지만 좀 더 수월하게 익히기 위해서”라고 김 강사가 말했다. 사지가 몸통에서 분리되는 듯한 동작들을 연달아 따라 하면서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옅은 신음과 함께 단내가 슬쩍 새어 나왔다. 누워서 발을 당기면서 상체를 동시에 일으키는 자세는 머리 속에서만 가능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였다. 김 강사는 “주걱으로 파내듯이 배에 ‘팍’ 힘을 줘야 한다”고 했으나 주걱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날 배운 동작은 스무 가지 정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제대로 배우면 적어도 6개월은 걸려야 익숙해질 동작들이었다.

1시간30분 가량 힘겹게 동작을 따라 하는데 어느 순간 내 몸이 아름다움을 만들어간다는 희열이 몸 안으로 번졌다. 격한 운동을 할 때 느끼는 쾌감과는 사뭇 달랐다. 땀냄새를 마구 풍기지 않고도 몸 안 칼로리를 태우면서 몸을 가꾸는 듯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여러 동작을 해서인지 몸이 바르게 잡혀가는 기분이었다. 오랜 사무실 근무로 내려갈 대로 내려간 엉덩이가 살짝 올라간 듯한 착각까지. 오랫동안 쓰지 않은 근육을 혹사했으니 다음날이 걱정이었는데, 통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혹시 발레 영재?

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발레 체험을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한국일보 라제기 문화부장이 발레 체험을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아재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며

발레 교습 며칠 후 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문득 떠올렸다. 국내 극장가에서만 725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국 배우 톰 홀랜드. 스파이더맨 복장의 새 주인이 된 이 21세 배우는 호리호리한 몸매와 낭창낭창한 유연성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중국 무술이라도 배운 듯한 날렵한 몸동작이었는데, 홀랜드의 이력을 뒤져보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12세 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탄광촌 소년 주인공 빌리 역할을 맡았다. 오디션에 합격한 후 2년 동안의 수련을 거치고 무대에 올랐다. 요컨대 세계 영화팬들의 탄성을 자아낸 스파이더맨 액션 뒤에 발레가 있었던 셈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영국왕립발레학교에 들어간다. 성장하여 남자 무용수들이 백조로 등장하는, 매슈 본 안무의 ‘백조의 호수’ 무대에 오른다. 남자들의 우람한 어깨근육이 꿈틀거리며 역동적인 몸동작을 만들어내는 이 공연은 갖은 편견을 날린다. 이봐 백조가 다 암컷이라는 생각은 왜 하는 거야? 발레는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은 버려. 그렇다면 나도 ‘아재 빌리 엘리어트’가 되지 말라는 법 없지 않은가. 빌리 아버지 역할에나 어울릴 나이라고? 인정! 그래도 상상은 즐겁다. 짧은 발레 체험은 유쾌한 여운을 남겼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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