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수의 소설은 스펙터클이 가진 파동에 심드렁하다. 호랑이가 동물원을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에서 소설의 감정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추적의 서스펜스, 결투의 공포, 승부의 타나토스라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해 겨울에 집을 나간(탈출한) 아내, 첫눈에 반한 사람, 고양이에 대한 애착이다. 소설의 마지막, 호랑이를 유인하기 위한 용도였던 생닭 스무 마리를 백숙으로 요리해 먹는 남자들의 어수룩한 장관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애수는 바로 그 ‘새로운 볼거리’가 되지 못한, 스펙터클의 파동이 미치지 못한 ‘별 것 없는 (이야기가 아닌) 얘기’에서 비롯된다. 정영수는 스펙터클을 늦추는, 막아서는 얘기들을 계속해서 잇는 방식으로 소설이라는 삶에 밀착한다.
소설집 ‘애호가들’은 휘황찬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럴싸한 얘기로 조성된 세계다. 잘 들려주고 잘 듣게 한다. 정영수는 ‘의미 있어 보이는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와 조응하여 “우리는 어쩌면 그저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은 것일 뿐일지 모르겠다(‘애호가들’)”고 자각하는 사람의 말에 관심을 둔다. 벌어진 사건(스펙터클)이 아니라 벌어진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사연에 더 귀 기울이고, 극적인 사건의 가운데에서도 극적인 주인공이 되지 않는 등장인물 간의 우그러진 관계망에 골몰한다. 마치 우리 삶에 허락된 스펙터클이 사실 그리 많지도, 그리 경이롭지도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시체를 묻는 와중에도 헤어진 이유를 묻고 답하는 이들의 대화를(‘레바논의 밤’), 쌍둥이 동생과 살해, 뒤바뀐 운명, 자살 같은 스펙터클을 ‘파란만장’으로 정리하고, 사고뭉치 형의 수감과 석방과 구토(!)라는 신파를(‘지평선에 닿기’) 구구절절한 소설의 마침표로 찍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점차로 느끼게 된다. 살며 한 번 볼까 말까 한 죽은 사람의 몸보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 형이 두부를 토해 내는 일이 더 대단한 사건이라는 것을. 정영수에게 스펙터클은 지루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오히려 그것이 지긋지긋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호가들’은 이런 인용문으로 책을 연다. “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만 믿어요$” 정영수를 따른다면, 스펙터클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스펙터클의 맞은편에 있다.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이, 언제나 죽은 것들이, 스펙터클의 공허가, 삶이. 정영수의 소설은 이 평범한 얘기를 최선을 다하지 않는 척하며 최선을 다해 들려준다. 극적인 사건을 ‘떡밥’으로 쓰면서 그 사건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으려는 정영수의 각오를 응원하고 싶다. 그 각오가 오늘의 독자인 나를 잠시 의욕적으로 살게 했기 때문이다.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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