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에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본다. 쫓기듯 살아가며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내 기분의 상태와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삶의 표정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의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의 모습까지…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은 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작품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을 너무 이상적으로 그리거나 또는 사람을 너무 사람 이하로 문제화하면서 흥미를 자극하는 소설들이 적지 않다. 어른을 강요하는 계몽적 시선이나 겉잡을 수 없는 욕망 내지 광기를 특화하는 시선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해하는 광경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한다. 정이현의 소설은 이런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우리를 소설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평범과 보통 속에 깃든 비범과 특별함도 발견했다.
가령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개방할 수 없는 세계에 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내밀한 관계를 맺은 타인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 기억의 능력이 우리가 살아 있음의 증거로서 슬픔에 이르는 능력이기도 하다는 걸 이 작품은 섬세하게 보여 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픈 소설이다. 이 소설이 어떤 참혹한 사건을 배경으로 숨겨 두고 있는지는 동시대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아픈 이유는 꼭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에 쫓기고 억눌려 사는 우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숨이 막힌다. 이 작품은 우리가 도대체 어떤 미래를 만들고 있는지, 혹은 삶의 주요한 국면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스스로 삶을 망가뜨리고 있지는 않는지를 아프게 묻는다. ‘영영, 여름’은 놀라운 소설이다. 소녀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가던 이야기가 돌연 분단이라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야기의 흐름이 예상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독자는 말 그대로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이 놀람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반전 때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분단이라는 현실적 상황을 얼마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감쪽같이 지우고 살았는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제목을 두고 ‘상냥’과 ‘폭력’의 모순적인 결합으로써 이 책이 우리 시대의 특징인 친밀을 가장한 폭력적 관계를 적확하게 발견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상냥이라는 말로 휘감을 수 없는 더 많은 부드러움이 녹아 있으며, 폭력이라는 말로 대표할 수 없는 더 많은 억눌림이 기록되어 있다. 소설집의 제목에 ‘시대’라는 어휘를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차갑게 시대를 진단하는 작품들을 써 온 정이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송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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