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蔣介石, 1887.10.31~1975.4.5)는 중화민국(대만)의 ‘국부(國父)’ 쑨원(孫文, 1866~1925) 사후 국민당 당권을 장악한 이래 75년 숨질 때까지 총통을 지낸 독재자다. 본명은 중정(中正), 개석은 그의 자이다.
세기 말 전란기에 성장한 그의 꿈은 군인이었다. 19세에 위안스카이의 속성학당(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일본 육사로 유학해 1909~11년 일본군 군관으로 복무했다. 그 해 신해혁명을 맞아 귀국한 그는 쑨원의 참모로 활약하며 출세했고, 1차 국공합작기 군사자문단으로 소비에트에서도 군사학을 익혔다. 쑨원의 황푸군관학교 초대 교장을 맡아 장교를 양성,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북부 군벌과의 북벌 전투,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 제국주의 전쟁..., 그는 오직 전쟁과 권력투쟁으로 환갑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31년 창설해 백색테러 등에 동원하던 준군사정보기관 남의사(藍衣社)의 패악은 49년 타이완 이전(移轉)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는 반공 이념과 유교적 군국주의로 민주주의를 억압했고, 집권기 경제 번영도 미국의 원조ㆍ지원 덕이 컸다.
공직자 부패 척결은 그의 ‘치적’이었다. 당과 군의 부패를 내전 패배의 주원인으로 파악한 그는 설욕전을 벌이듯 비리와의 전쟁에 나섰다. 63년 뇌물ㆍ횡령 공직자 사형(死刑) 등을 골자로 한 전시부패방지법 제정. 72년 향응 금지와 관혼상제 통지 금지 등 내용의 ‘공직 혁신 10항’(72) 공표. 하지만, 밀수에 손을 댄 며느리(일설에는 조카며느리)까지 처형했다느니 권총을 선물해 자살하도록 했다느니 하는 설은 둘째 며느리 시징이(石靜宜, 1918~1953)의 석연찮은 죽음의 사연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방직업 갑부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서 유학한 시징이는 장제스의 둘째 장웨이궈(張緯國, 1916~1997)와 43년 결혼한 뒤로도 가업이던 학교법인 의령(宜寧)재단 이사장을 맡는 등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53년 초 대규모 군납비리 조사 과정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국방예산에서 200만 달러를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고, 쑹은 그 책임을 자기를 거들던 며느리에게 전가했다. 직후인 3월, 시징이는 출산 도중 골반협착에 이은 심장마비로 숨졌다. 비리 주범은 쑹메이링인데 장제스가 진실을 감추기 위해 괴한을 시켜 며느리를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