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제학자 스테판 지만스키와 저명한 축구 컬럼니스트 사이먼 쿠퍼가 쓴 ‘사커노믹스’라는 책의 두 번째 장 제목은 ‘왜 잉글랜드는 항상 패배하는가’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을 즐기는 8단계’란 부제가 붙었는데 다음과 같다.
1단계 : 지역예선, 월드컵 우승을 확신 한다→2단계 : 월드컵에서 꼭 과거의 적국과 맞붙는다→3단계 : 잉글랜드는 유독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요상한 불운 때문에 졌다고 결론짓는다→ 4단계 : 상대 팀은 반칙만 한다→5단계 : 우승컵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탈락한다→6단계 : 탈락 다음 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7단계 : 희생양을 선택한다→8단계 : 다음 월드컵은 잉글랜드가 반드시 우승하리라 믿는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이나 유럽축구선수권(유로) 등 메이저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건 51년 전인 196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이 마지막이다. 이 책은 자국대표팀을 우승후보라 철썩 같이 믿는 잉글랜드 팬과 미디어가 패배 뒤에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꼭 핑계를 찾는다고 꼬집는다. 또한 잉글랜드는 축구종주국일 뿐 세계 최고는 아니며 월드컵을 제패하지 못하는 건 이변이 아닌 당연한 결과라고 냉정히 진단한다.
하지만 유로 2020이나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우승 트로피에 입 맞추는 ‘삼사자 군단(잉글랜드 대표팀 별명)’을 진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끼 사자’들이 연이어 세계무대를 호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29일(한국시간) 인도 콜카타에서 벌어진 2017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월드컵 결승에서 스페인을 5-2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전반에만 두 골을 내주고도 다섯 골을 몰아넣어 대역전승을 거뒀다. 잉글랜드는 지난 6월 한국에서 막을 내린 U-20 월드컵에 이어 U-17 월드컵까지 석권했다. 두 대회 모두 잉글랜드의 우승은 최초다.
‘세계 최강’이 막연한 환상임을 인정한 잉글랜드축구협회(FA)가 유소년 선수부터 착실하게 길러낸 결과다.
스티브 쿠퍼(38) 잉글랜드 U-17 대표팀 감독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 유소년 아카데미 감독 출신으로 U-15, 16 사령탑도 지냈다. FA는 어린 선수들의 프로 출전을 제도화해 장려하고 프리미어리그 유명 팀의 육성 노하우도 적극 도입했다. 이번 대회 골든볼(MVP) 수상자인 필립 포덴(17)은 소속 팀 사령탑인 펩 과르디올라(46) 맨체스터 시티 감독이 “인도에 보내기 싫다”고 할 정도로 이미 팀에서 인정받는 선수다. 과르디롤라 감독은 “포덴은 우리 팀의 뛰어난 선수들과 매일 훈련하며 경험을 쌓는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했다. 8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리안 브루스터(17) 역시 ‘리버풀의 미래’로 불린다. 잉글랜드 U-20 월드컵 우승 주역이었던 도미닉 칼버트-르윈(20)은 에버턴 1군에서 올 시즌 18경기에 출전해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쿠퍼 감독은 “이번 우승은 우리가 진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린 선수들을 발굴, 성장시킨 클럽아카데미 시스템의 결과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BBC는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결승 장면에 대해 “팀 컬러가 뒤바뀐 것 같다. 잉글랜드가 볼을 점유하고 스페인은 역습을 노렸다”고 복기했다. 잉글랜드가 결과 뿐 아니라 내용도 주도했다는 의미다.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게리 리네커(57)는 “새로운 황금 세대의 등장”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4년 전 그렉 다이크 FA 회장은 “2020년 유로 4강, 2022년 월드컵 우승이 목표”라고 했다. BBC는 이 발언을 언급하며 “아직은 먼 미래지만 잉글랜드 축구가 청소년 레벨에서 엄청나게 발전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전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