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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알리ㆍ포먼 대전(10월 30일)

입력
2017.10.3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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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30일(자이르 현지 29일)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가 맞붙었다.
1974년 10월 30일(자이르 현지 29일)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가 맞붙었다.

1974년 10월 30일 아프리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샤에서 열린 프로복싱 WBA WBC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과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는 인류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최강의 복서로 꼽히던 24세 무패의 챔프 포먼과 전성기를 지난 32세 전 챔프 알리의 대전. 알리는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 경기는 노장 챔프의 부활과 복서로서의 전적을 넘어, 한 불멸의 스포츠맨을 낳은 경기였다.

18세이던 1960년 프로복서로 데뷔, 무패의 전적으로 64년 WBC 챔피언이 된 알리는 67년 2월 WBA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알리 스텝(Ali Step)’이라 불리는 특유의 현란한 풋워크와 대담한 오픈 가드, 트레이드 마크였던 소나기 펀치의 31전 전승의 챔피언. 링 바깥 활약도 대단했다. 그의 언변은 몸놀림 못지 않게 빠르고 우아했다.

그 무렵 그는 흑인 민권운동가로서, 맬컴 엑스의 ‘네이션 오브 이슬람’ 열성 회원이기도 했다. 켄터키 주 루이빌 출신인 그는 인종 차별에 민감했다. 12세에 복싱을 시작해 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라이트 헤비급)을 딴 뒤 곧장 프로로 전향한 것도 차별에 대한 반감 때문이 한몫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차별 없는 링을 사랑했고, 별로 알아주지 않는 메달리스트가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챔피언이 되고자 했다. 그가 67년 4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해 재판에 회부되면서 챔피언 타이틀과 함께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재판에서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서 남의 자유를 위해 싸우라니. 하물며 베트콩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무시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3년 5개월여 동안 링에 서지 못했다. 강연자로서 그는 조국의 차별과 싸웠다. 70년 10월 다시 링에 오른 그는 전성기의 그가 아니었다. 이길 때가 더 많았지만 대부분 이길 만한 상대였다. 팬들은 71년 조 프레이저에게 지고 73년 켄 노턴에게 무릎 꿇은 그를 기억했다. 그 둘을 무참히 꺾은 챔프가 조지 포먼이었다.

프로 데뷔 이후 첫 패배를 경험한, 알리만큼 멋진 이야기를 지닌 위대한 챔프 포먼은 훗날 알리와 친구가 됐고, “알리를 상대하려면 (기량보다 먼저) 스스로 그에 걸맞은 위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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