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민식(55)은 유화 같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소묘 같은 연기를 추구하는 여느 배우와 달리, 자신의 색을 진하게 덧입힌다. 그래서 그를 영화에서 보면 맡은 역의 밀도가 유독 높아 보인다. 북한군(‘쉬리’)에서 삼류 건달(‘파이란’) 그리고 태만한 직장인(‘올드보이’)... 흔한 캐릭터도 그가 연기하면 기괴함과 특유의 비장미가 도드라진다.
“제가 생각하는 연기는 4B 연필로 그리는 크로키(스케치)가 아녜요.” 27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최민식은 연기를 “나이프에 물감 듬뿍 묻혀 캔버스 뚫어지게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비유했다. 그래서 올해로 데뷔 28년을 맞은 배우의 바람은 “뜨거운 사랑을 하듯 연기를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연기 색을 고민하는 최민식은 리메이크작인 영화 ‘침묵’(11월2일 개봉)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 원작인 중국 영화 ‘침묵의 목격자’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특징이 도드라졌다면, ‘침묵’은 극중 재벌 총수인 임태산(최민식)과 주변 인물의 심리 변화에 힘을 싣는다. 최민식은 영화에서 약혼녀의 살해범으로 자신의 딸이 용의자로 지목되자 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최민식은 윤리와 법을 뭉개는 데 거리낌 없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원동력을 “부성”에서 찾고, 배역의 감정에 살을 붙였다. 후반부 임태산이 법정에서 광기 어린 표정으로 내 뱉는 대사는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교육부 전 고위 공무원의 ‘민중은 개돼지 발언’을 연상케 하듯 매섭고 서늘하다.
“임승용 (용필름)대표와 정지용 감독과 모여 어떻게 원작을 각색할까를 두고 논의하다 우리 식으로 맛을 살려보자는 데 합의를 했어요. 그래서 원작의 스릴러적인 요소보다 순수한 부성에 포커스를 두기로 했죠. 그 방식이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최민식은 이 영화의 미덕으로 “인간성 회복”을 꼽았다. “모든 걸 다 가진 남자가 모든 걸 스스로 내팽개치고 난 뒤 자신이 진짜로 원했던 것을 얻는” 점이 울림으로 남았다.
까마득한 후배들과의 연기 호흡은 새로운 자극이 됐다. 최민식은 이하늬(34)와 멜로 연기를 선보이고, 전기 수리 기사로 나오는 류준열(31)과 살벌한 감정 대립을 보여준다. 그는 후배 얘기가 나오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하늬에겐 선입견이 있었어요. ‘싸가지가 없을 것 같다’가 아니라, 그 친구가 출연한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과연 유나란 역을 깊이 있게 해낼 수 있을까’ 갸우뚱했거든요. 그런데 첫 촬영하고 나서 바로 마음을 놨어요. 엄지손가락 세워 ‘오, 이하늬’라고 해줬죠. (류)준열이는, 참 대단한 놈이에요. 아휴, 대본에도 없는 데 욕하고 때리려고 하고... 대담하면서도 유연하죠.”
최민식은 2010년부터 한 해도 빠짐 없이 신작을 선보여왔다. 충무로에서 여전히 손꼽히는 배우지만, 최근엔 숙제도 생겼다. 2014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명량’ 이후 ‘대호’와 ‘특별시민’이 흥행에 쓴 맛을 봤다.
최민식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했다. 그는 작품을 선택할 때 제일 고민하는 점도 “내가 끌리는 얘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작품을 고를 때 고민하는 건 변신은 절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손오공도 아니고, 그런 것(변신)은 표피적인 문제일 뿐이죠. 전 제가 미칠 수 있는 작품이어야 돼요. 그러려면 내가 하고 싶은 역, 얘기, 표현하고 싶은 세상이 담겨야 하죠. 여태껏 계속 이걸 고민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내가 빠져야 작품이 영글고, 결국 관객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요.”
이 말만 들으면 고집 센 중년 배우로 보이지만, 최민식은 지인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 그는 ‘침묵’에서도 촬영장 분위기 메이커였다. 계급장 떼고 먼저 후배들을 찾아갔고, 농담도 먼저 건넨다. 이 영화를 택한 가장 큰 이유도 제작들에 대한 정과 신뢰였다. ‘침묵’을 찍은 정지우 감독은 최민식과 ‘해피엔드’를 함께 했다. 이 영화의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는 최민식과 ‘올드보이’로 인연을 맺었다. 실제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웃음이 많고, 농담도 잘했다. 기자가 최민식의 현 고민을 묻자 그는 “아, 이런 건 술 먹으면서 얘기해야 되는데...”라고 너스레를 떨어 인터뷰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배우로서 제 지금 고민이자 바람은 배우와 제작진이 같이 즐거울 수 있는 작업을 하자예요.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긴 해요. 이번에 정 감독과 18년 만에 만나 영화 찍으면서 ‘더 정신차려야겠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정 감독은 타성에 젖지 않고 항상 깨어있었죠. 소주 한 잔 사려고요. (정 감독에게) ‘내가 다음에 더 잘할게’라면서, 하하하.”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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