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영역으로 여겨지던 것이 인간의 영역으로 흘러나온 예가 있었는데 바로 ‘제비뽑기’이다. 현대인들이 점심 메뉴를 정하기 위해 하는 ‘사다리 타기’나 ‘주사위 던지기’는 본래 인간의 깊은 신심(信心)하고도 관련이 있었다. ‘운’을 즐기자고 하는 이 세속 놀이의 이면에는 신이 그 ‘우연’마저 주관하신다는 절대적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울 경우 신께 의탁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잘못한 이를 잡아내기도 하였다. 요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쓰여진 시기가 기원전 약 기원전 5~4세기쯤으로 추정되는 요나서의 기록을 보면, 요나라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한 배에 오른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러 배가 그만 태풍을 만나 부서지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요나 1장 7절)
제비뽑기로 바다에 던져진 요나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폭풍은 잠재워졌다. 여기서 우연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려면 정말 절대적인 신앙적 믿음이 요구된다. 심지어 신앙인이라 해도 현대인들 가운데 이 제비 뽑기식의 운명 결정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옛적에는 일종의 심판이면서 신에게 결정에 의뢰하는 ‘시죄’(試罪ㆍordeal)’ 라는 것이 있었다. 성서에도 그 한 예가 나오는데, 남편이 아내를 의심할 때 행해졌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한 것이 의심이 되면, 남편은 아내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간다. 그리고는 성막 바닥의 흙을 긁어서 물에 탄 다음 여자에게 마시게 한다. 그 더러운 물로 인해 여자가 탈이 나면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 난 것이고, 마시고도 끄떡없으면 여자는 정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탈이 나는 증상은 여자의 배가 부어 오르고 허벅지가 마르게 된다는 것인데,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기록은 구약성경 민수기 5장에 나오는데, 여인의 성적 문란은 당시 가부장적이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유독 별나게 다루어졌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은 딸이 음란한 일을 하면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현대 여성들은 성서의 원시적 배경에 꽤 마음이 불편해 지기도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에 꼭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하자.
고대 바벨론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여자의 부정을 가렸다. 함무라비 법전 132조에 의하면 의심받는 여자는 자신의 정직함을 증명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다. 강물에 가라앉아 죽으면 부정했던 것이고, 떠서 헤엄쳐 살아 나오면 정직했던 것이다. 당시 여자들은 꼭 수영을 배웠어야 했겠다. 남편과 공모한 이웃들이 씌운 억울한 누명에서 살아남아야 하지 않았을까?
제비뽑기, 공적인 법적 절차였다
시죄는 고대 사회에서 매우 공적인 법적 절차였고, 중세 유럽에서도 오랜 동안 행해졌던 심판이었다. 방식도 다양했는데, 강물은 약과였고 때론 불로 판단하기도 했다. 마른 빵과 치즈를 먹게 하여 목이 메는지 아닌지 보기도 했는데, 목이 메면 잘못이 발각된 것이었다. 정말 신에게 전적인 믿음이 있어 행했던 절차였는지, 아니면 신의 역사로 가장한 고의적 괴롭힘이었는지 의심이 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일이다.
이런 내용이 매우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으로 느껴졌다면, 다음에 볼 성서의 기록을 통해 위안을 받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 볼 만 한 놀라운 내용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닌, 사회의 어떤 신중한 사안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에도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였다. 현대 사회는 그런 사안을 결정 할 때 다수결 표결을 주로 적용하였을 것이다. 성경에는 뚜렷한 다수결 표결 같은 것이 없다. 다만 독단을 피하기 위해 다수가 모여 서로 의논하여 결정을 하였던 기록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 최종 의결은 모임의 수장이나 ‘어르신’이 내리곤 했다.
성서에 가득한 제비뽑기 기록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날 조짐이 있을 만한 것은 제비뽑기로 정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성서 기록상 최초로 들어가 차지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 땅을 나누어 각 지파에게 분배하게 되었다. 예민한 ‘부동산’ 문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좋은 땅을 가지려고 싸우기 보단, 그냥 하나님을 믿고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여호수아서 18장 10~11절) 심지어 군대도 제비뽑아 갔던 기록이 있다. (사사기 20장 9절)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부동산과 군대는 예민한 문제였나 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냥 제비뽑기를 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군소리 없이 행복하게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비뽑기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은 잠언 16장 33절에 잘 나와 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아무리 신심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비뽑기의 경우 인간적인 불안감이 전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 합리적인 인간적 기제를 살짝 가미하기도 했다. 친족끼리 땅을 나눌 때에도 제비를 뽑았는데, 큰 가족에게는 큰 땅을 작은 가족에게는 작은 땅을 주는 합리적 가이드라인 안에서 행해졌다. (민수기 33장 54절) 신을 믿는다고 하여 인간 신심의 불완전함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은 것이다. 결국 어떡해서든지 사람끼리 평화적 해결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신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다 같이 평화롭게 잘 살자는 인간적 바람과 어우러져 멋진 기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우연과 운, 믿음에 대한 인간의 ‘짜릿한’ 기대감이 결국 신성을 제거한 오락을 낳게 되었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운에 빌어 게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베이트 미르심(Beit Mirsim)’의 왕국 터에서 게임 한 세트가 발견되었는데, 5개의 작은 피라미드형 물체와 5개의 작은 원뿔, 상아로 만든 주사위가 발견된 것이다. 기원전 1,200년 경의 유물이며, 고대 이스라엘에도 운으로 하는 게임들이 성행하였던 것 같다. 그 기원은 이집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매우 신성하고 엄격한 법적 절차여서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기까지 했던 제비뽑기가, 그 신성이 제거되어 그저 인간의 유희를 위한 카지노나, 화투, 모노폴리, 트럼프 놀이에 응용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 유희도 심각해지면 종종 사람의 인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너무 고민이 커서 던졌던 동전이, 고대에는 어느 한 사람을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 던져지기도 했던 것이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 성과 속이 아닐까.
이 신성한 제비뽑기를 다시 심각하게 부활시키는 것은 어떨까? 현대 사회가 옳은 의사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신뢰하는 다수결이 때론 무섭다. 그저 ‘다수’가 이기는 표 대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불순한 패거리 문화나 여론몰이로 천박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때마다 찾아오는 우리네 각종 선거를 떠올려 보자. 독단적 결단을 피하고 공동체 소수의 의견까지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반영하자는 취지가 민주주의의 다수결이지만, 자유롭고 공평하고 투명하게 의견을 취합하고 정보를 교류하여 민주적인 의결에 다다르기에는 우리 인간은 너무 악해 보인다. 무슨 수를 쓰든지 정보를 왜곡하여 거짓을 양산하며 각종 매체들을 통해 선동까지 하니, 결국에는 사회의 공의와 정의가 파손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공동체 전체가 고스란히 앓는다.
다수결 대신 제비뽑기는 어떨까
성서에서처럼 제비뽑기를 하려면 우리 사회에는 그만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꼭 종교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와 서로에 대한 인간적 믿음이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세속 사회도 제비뽑기를 평화롭고 공정한 의결방식으로 고안해 나갈 수 있다. 제비뽑기에 가이드라인을 접목했다는 사례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선한 ‘의지’가 있다면 고대의 이 전통을 왜 ‘응용’하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매우 현실적인 구절도 남겼다. 깊이 생각해 보자.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잠언 18장 18절)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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