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길에 옛 교복차림 일가족
“여고시절 생각”… 남녀노소 북적
계산성당 제일교회 정소아과 등
골목마다 근대문화유산 즐비
재개발 대신 있는 그대로 관광화
9월까지 245만명, 지난해 추월
관광객 지출로만 벌써 250억원
호텔ㆍ게스트하우스도 속속 신설
대구 중구 대봉동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김광석길)은 수년 전부터 대구의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골목길이다. 대구의 도심 동맥인 신천대로 서쪽 콘크리트 옹벽과 방천시장 사이에 난 길이 350m, 너비 3-5m에 불과한 보잘것없던 이 골목길은 주말이 되면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거린다.
지난 21일 찾은 김광석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운동화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옹벽에 새겨진 벽화를 느긋하게 감상하더니 찻집으로 들어갔다. 한 유명 커피숍 앞 담벼락엔 요즘 교실에서 거의 사라진 녹색 칠판이 내걸려 있었다. 그 앞엔 1980년대 초반까지 입었던 옛 교복차림의 일가족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린이와 엄마, 이모, 할머니 등은 하얀 칼라에 까만 재킷과 치마교복을 입었다. 70대 할아버지는 까만 교복에 모자는 물론 1980년대까지 중고생들이 주로 썼던 책가방도 들었다. 할머니는 "아유... 옛날 여고시절 생각이 나네요. 어디 가서 이렇게 해 보겠어요"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연인으로 보이는 20대 남녀는 골목길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할머니 앞으로 다가가 설탕에 소다를 섞어 연탄불에 녹인 뒤 굳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본을 뜨는 '달고나'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일부 남은 허름한 건물과 종이딱지 등은 시간여행을 온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도심공동화와 낙후의 대명사격인 대구 중구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헌 건물을 부수고 좁을 길을 넓히는 대규모 개발사업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골목길을 최대한 살리는, 도심재생사업을 통해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관광 격언에 따라 하찮아 보이는 골목길에 스토리를 입혔다.
관광객이 몰려왔다. 사라진 호텔이 다시 생겨났다. 한옥집이나 적산가옥 등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도 급증했다. 잊혀졌던 대구 중구의 골목길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거듭 나고 있다.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근대골목'을 찾은 관광객은 총 245만명에 이른다. 지난해 전체 239만9,000여 명을 이미 넘어섰다. 이 중 2014년 9월 계수기를 설치한 김광석길(100만8,780명)과 이상화고택 등이 있는 계산예가 2곳만 144만1,830만명에 이른다. 이 같은 추세라면 300만 명도 넘을 전망이다. 중구청이 관광객 집계를 시작한 2008년 287명과 비교하면 9년 만에 1만배 이상 는 셈이다.
이에 따른 경제적 효과도 엄청나다. 중구청에 따르면 올들어 직접적인 관광소비지출만 250억원 가량으로 추산했다. 게스트하우스 호텔 등 건축투자는 별개다.
대구, 그 중에서도 중구는 전국 그 어느 지역보다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은 곳이다. 계산성당 제일교회 선교사주택 정소아과 등 100년 내외의 건축물이 중구지역엔 즐비하다. 조선시대 때부터 부자들이 살던 동네로 유명한 진골목(긴 골목)과 종로 주변에는 일본식 적산가옥과 한옥형태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8도 중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비껴간 덕분이다.
이는 도심공동화와 낙후를 초래했다. 비좁은 골목길과 노후건물이 그대로 남았다. 대규모 재개발도 사업성 부족으로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중구청은 이것을 무조건 부수고 허무는 대신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도심재창조형 개발에 나섰다. 2007년부터 본격화한 근대골목 관광자원화가 대표적이다.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를 비롯, 근대문화공간과 경상감영공원, 종로ㆍ진골목, 봉산문화거리 등에 공공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안전하고 걷고 싶은 쾌적한 도심공간 조성을 시작했다.
먼저 노상의 한전 배전반을 지중화하고, 어지럽게 널려 있던 노점상을 정리하는 등 가로환경부터 개선했다. 생계형 노점상들에겐 규격화된 이동형 노점을 제공했다. 특정 장소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우악스럽게 크고 너저분한 간판도 작고 세련된 것으로 교체했고, 차량 동선을 조정해 혼잡을 줄였다. 근대문화공간 디자인개선사업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역사적 장소 개발을 통해 도심관광명소를 만들고, 도심지 주변 역사문화자원과 연결해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도록 추진했다"며 "문체부가 뽑은 '2012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등 중구 200만 관광시대를 선도하고 골목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도심재창조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자평했다.
최근에는 그 동안 ‘어르신들의 거리’로 인식돼 온 종로와 중구 북서쪽에 위치한 북성로 일대가 젊음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다. 이 지역은 시니어들의 사교장으로 유명한 ‘미도다방’과 성인클럽인 ‘콜라텍’ 10여개가 성업하던 곳이다. 젊은 층은 남북으로 나 있는 대중교통전용지구 서쪽으로 좀체 넘어가지 않았다.
4, 5년 전부터 상황이 변하고 있다. 한옥이나 낡은 상가건물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둘 생겨났다. 붙어 있는 여러 채의 한옥을 매입해 만든 게스트하우스는 숙소와 수영장, 바비큐장, 파티장 등을 갖춘 국제적 사교클럽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식의 게스트하우스가 10월 현재 19개나 된다. 사라지던 관광호텔도 ‘부띠크호텔’, ‘디자인호텔’ 등의 형태로 속속 들어서고 있다. 한ㆍ양식당과 이벤트홀 등을 갖춘 일반호텔도 7개나 된다. 1980년대까지 대구지역 호텔의 대부분은 중구에 몰려있었지만 금호호텔을 비롯, 한일 로열 국제 동인호텔 등이 차례로 문을 닫는 호텔 ‘흑역사’를 간직한 지역이다.
프랜차이즈 커피숍 등이 종로 일대에 포진하더니 최근에는 한식 양식 퓨전식 각종 디저트카페가 선보이고 있다. 어르신들이나 찾는 곳으로 알고 있던 골목이 최근에는 중고생도 찾는 소통의 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종로에서 죽평다관을 운영 중인 이경묵씨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 일대는 금고 제작ㆍ판매업소나 가구판매상이 주력이었고, 고깃집이나 밥집,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 등이 많았다”며 “7, 8년 전부터 본격화한 가로환경 개선사업으로 통행이 불편해지자 기존 상인들이 떠났고, 공사가 끝난 뒤 그 자리에는 커피숍이나 퓨전카페 같은 게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엔 10배 이상 오른 임대료 등으로 기존 상인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도 보여 장기적인 발전방안을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대구=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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