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리그 같이 올라가자”
고 조진호 부산 감독과 약속
FA컵 결승 이어 승강PO 총력
지난 해 말 공격수 이정협(26ㆍ부산 아이파크)은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울산 현대와 임대 계약이 끝난 그는 원 소속 팀 부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부산은 지난 시즌에도 클래식(1부) 승격에 실패해 여전히 챌린지(2부) 소속이라 마음에 걸렸다. 마침 클래식 몇몇 팀이 이정협에게 관심을 보였다.
갈등 중인 이정협을 故 조진호 부산 감독이 불렀다. 조 감독은 이정협에게 “1부에서 뛰고 싶은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너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 나와 함께 올 시즌 잘 해서 내년에 1부로 같이 올라가자”고 설득했다. 이정협은 지난 시즌 30경기 4골 1도움에 그쳤다. 2015년에 ‘슈틸리케의 황태자’ ‘신데렐라’로 불리며 국가대표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기록이었다. 그 전까지 조 감독과 일면식도 없던 이정협은 느낌이 참 좋았다고 했다. 그는 26일 부산 강서구에 있는 구단 클럽하우스에서 진행된 본보와 인터뷰에서 “조 감독님과 첫 만남은 편안했다. 이 분에게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조 감독이 선수시절 국가대표로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한때 알아주던 ‘골잡이’였고 지도자로 변신해 박기동(29ㆍ수원), 아드리아노(30ㆍ스좌장) 등 여러 명의 스트라이커를 부활시킨 점도 이정협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정협은 조 감독 아래서 힘차게 비상했다. 올 시즌 개막과 함께 7경기 연속 골을 터뜨렸다. 모두 그림 같은 득점이었다. 절정의 감각을 보이다가 지난 5월 발목 부상을 당해 약 두 달간 쉬었다. 그 때도 조 감독은 “걱정 하지마. 완전히 다 낫고 돌아와도 돼”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조 감독과 사제의 정을 쌓아가던 이정협은 10월 10일을 잊을 수 없다. 클럽하우스에서 ‘조 감독이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는 기사를 본 것. 믿기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팀 닥터에게 전화했더니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받은 충격 중 가장 컸다”고 말끝을 흐렸다.
부산 선수들은 조 감독에게 FA컵 결승진출이라는 값진 선물을 했다. 부산은 25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수원 삼성과 FA컵 준결승에서 열세라는 평을 딛고 승부차기 끝에 이겼다. 조 감독 타계 후 안방에서 열린 첫 경기였다. 이정협은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천금의 동점골로 승리에 발판을 놨다. 동료가 찔러 준 패스를 받은 뒤 그대로 슈팅을 때려 골문 구석을 꿰뚫었다. 그는 “조 감독님은 문전에서 볼을 잡아놓으면 이미 늦는다며 논스톱 슈팅을 평소에 많이 강조하셨다. 내가 솔직히 이런 장면으로 넣은 골이 많지 않다. 어제는 감독님께서 도와주신 것 같다”고 했다. 이정협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그에 따르면 조 감독은 운동장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지도자였다. 이정협도 숱하게 혼났다. 대표 소집을 앞두고 챌린지 경기를 약간 소극적으로 뛰자 조 감독은 동료들이 다 있는 라커룸에서 그를 향해 “그 따위로 하면 대표팀에서 통할 것 같으냐”고 강하게 꾸짖었다. 관중들 앞에서 “그렇게 몸싸움 피할 거면 아예 뛰지 마”라고 질책한 적도 있다. 최만희 부산 구단 사장은 “조 감독이 이정협을 엄하게 다스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운동장을 벗어나면 조 감독은 180도 달라졌다. 장난도 먼저 걸고 자주 사진도 찍자고 하는 등 영락없이 정 많은 ‘동네 형’이었다.
이정협은 하늘에 있는 스승에게 이제 ‘승격’을 바칠 각오다.
챌린지 2위를 확정한 부산은 내달 18일 플레이오프(PO)에서 맞붙고 여기서 이기면 22일과 26일, 클래식 11위팀과 승강PO를 치른다.
이정협은 “감독님은 올 시즌 초부터 ‘승격’을 입에 달고 사셨다. 미팅 때도 늘 ‘승격’이란 말이 들어갔다. 어제 수원을 누른 정신력이라면 우리가 플레이오프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며 “감독님께 꼭 승격을 안겨드리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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