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차기 권력, 모하메드 빈 살만(32) 제1 왕위계승자(왕세자)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하자마자 국가 정체성을 뒤흔들 이슬람주의 방향 전환을 예고하는 등 경제ㆍ사회개혁을 통해 ‘보수 사회’ 사우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30대 젊은 지도자가 그려낼 세계 최고 보수국가의 미래상에 국제사회도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24일(현지시간) 두 건의 파격 제안을 내놨다. 그는 이날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FII)’ 행사를 통해 무려 5,000억달러(약 563조9,500억원)가 들어가는 미래형 신도시 ‘네옴(NEOM)’ 건설 구상을 밝혔다. 사우디 북서부와 홍해 인근의 척박한 사막지대에 들어 설 네옴은 개발 면적만 2만6,500㎢에 달하는 대형 국책 사업이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신도시는 수백년에 걸쳐 세워진 기존 도시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네옴을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경제 허브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는 더 놀랄 만한 언급을 했다. “사우디를 ‘온건 이슬람’ 국가로 재건하겠다”며 열린 사회로의 탈바꿈을 선언한 것. 1927년 새 왕조를 연 뒤 90년 간 국정 운영의 근간이 돼 온 ‘보수ㆍ통제’ 이미지를 걷어내겠다는 공언인 셈이다. 심지어 “사우디는 30년 동안 정상이 아니었다” 등 국가 정통성을 허무는 발언까지 나왔다.
모하메드 왕세자의 비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방과 자율’이다. 네옴 프로젝트는 지난해 4월 탈석유 시대에 대비해 공표된 중장기 개혁 과제 ‘비전 2030’의 일환이다. 저유가 시대가 자리잡으면서 더 이상 석유에 의존한 경제구조로는 나라의 성장ㆍ발전을 꾀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반영됐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2015년 낸 보고서에서 “면세와 무상 복지 제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2020년이면 사우디의 국고가 바닥날지 모른다”며 민영화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개혁 시간표에 근거해 사우디 정부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지분(5%)을 매각하고, 국민에게 제공하는 물, 가스 등 공공재의 국가 보조금을 줄이기로 하는 등 경제시스템 다변화 및 재정확보 방안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 개혁은 국가 개조의 다른 한 축이다. 모하메드 왕세자가 언급한 ‘잃어버린 30년’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를 의미한다. 당시 이란에서 이슬람 시아파가 주도하는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에 두려움을 느낀 수니파 맹주 사우디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극보수주의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모하메드는 “사우디 인구의 70%는 30대 이하이다. 다시 30년을 극단주의와 싸우는 데 허비하지 않겠다”면서 ‘관용’과 ‘친절’이 미덕인 정상 이슬람 국가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달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기로 하는 등 개혁의 구체성을 입증하는 정책 성과 역시 확실히 엿보인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등 외신들은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 등 테러단체 범람으로 이슬람에 덧씌워진 부정적 시각을 탈피하려는 의도도 노선 수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모하메드표 개혁의 결말을 낙관하기는 이르다는 평가가 많다. 기본적으로 왕정 국가의 속성 상 변화의 정도가 어떻든 권력 강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원래 사우디 왕위 계승 1순위였던 빈 나예프는 사실상 모하메드 측의 협박과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왕세자 자리를 내준 것”이라며 그를 냉혹한 승부사로 봤다.
또 모하메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점찍었지만, 사우드 왕조 자체가 수니파 원리주의 ‘와하비즘’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태동한 만큼 개혁 수위는 태생적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미 CNN방송은 “최근 정부가 공공질서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급진적 글을 트위터에 올린 사용자를 기소하기로 하는 등 사우디는 여전히 통제 사회에 갇혀 있다”고 전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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